미중 패권 경쟁이 격화되면서 기업의 탈(脫)중국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은 중국에서 사업을 철수했거나 생산 기지를 인도·베트남 등으로 이전하는 추세다. 한국도 이런 흐름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특히 첨단 산업이 발달한 제조업 강국이라는 우리만의 특성을 살린다면 충분히 중국을 대체할 수 있는 투자처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싱가포르, 글로벌 기업 사업분석
자국 기술과 결합때 시너지 어필
P&G 제안에 흡족…美 본사 옮겨
日 배타적·대만은 지정학 리스크
미중과 FTA 맺어 시장접근 쉬워
해외기업 입장선 韓 좋은 투자처
이시욱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19일 “물고기가 안 잡히면 물고기를 찾으러 가듯 우리 정부가 먼저 글로벌 기업에 ‘우리나라에 투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며 역제안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싱가포르의 사례를 예로 들었다. 그는 “싱가포르는 글로벌 기업 P&G의 사업을 분석해 ‘싱가포르에 있는 어떤 기술과 합하면 좋은 결과물도 만들고 신시장 개척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보냈다”며 “P&G는 이후 싱가포르의 사업 환경이 마음이 들었는지 본사를 미국 신시내티에서 싱가포르로 옮겼다”고 소개했다.
서정민 숭실대 글로벌통상학과 교수는 “인도·베트남과 한국은 산업구조 자체가 다른 만큼 ‘차이나 엑소더스’ 현상 속 우리가 가지는 강점은 분명히 있다”며 “중국의 경우 임금 기준으로 봤을 때 스펙트럼이 넓은데 저임금 산업은 베트남·인도로 갈 수 있지만 고임금 산업 중 한국과 겹치는 분야는 한국으로 올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그는 “고임금 산업이 비중은 작더라도 부가가치가 커서 한국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다”고 지적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역시 “인도는 우리보다 관료들의 자의성이 크고 베트남은 체제 리스크가 있다”며 “이런 나라들은 규제 시스템 등 경제 전반이 투명하지 않고 예측 가능성이 떨어져 매력적인 투자처가 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시욱 교수도 “미중 갈등은 반도체·전자·배터리 등 하이테크 산업에서 한국에 이익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짚었다.
일본·대만 등과 비교해도 한국만의 강점이 있다는 게 이들의 판단이다. 일본은 외국인에 배타적인 문화가, 대만은 양안 관계 리스크가 치명적인 약점인데 우리나라는 이런 부분에서 상대적으로 낫다는 것이다. 허 교수는 “일본 검찰에 체포됐다가 음향 기기 상자에 몸을 숨긴 채 일본을 탈출한 닛산의 카를로스 곤 회장의 사례에서 보듯 일본 특유의 외국인에 대한 차별은 외국 기업 입장에서 일본에 성공적인 투자를 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게 할 것”이라며 “대만은 물가와 인건비 모두 싸지만 ‘제2의 우크라이나’ 예측마저 나올 정도로 너무 위험하다”고 설명했다.
미국·중국과 모두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었다는 점도 한국만의 강점으로 꼽혔다. 양쪽 시장 모두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만큼 두 나라 시장을 저울질하던 기업이 한국을 대체재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 교수는 “레토릭 수준에 머물렀던 ‘FTA 허브 국가 한국’이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 구조가 됐다”며 “미국은 USMCA처럼 자국과 FTA 맺은 국가에 대해 여러 이익을 많이 주는데 일본이나 유럽은 미국과 FTA를 맺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 시장 자체를 노리고 캐나다·멕시코로 진출할 기업이 아니라면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좋은 투자 시장”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글로벌 투자 허브가 되기 위해 불확실성을 키우는 불필요한 규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타다’와 같은 신산업의 경우 규제 하나로 사업의 존폐가 갈릴 수 있는 만큼 하지 못하도록 정해 놓은 것만 빼고 모두 다 허용하는 ‘네거티브 규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젊고 역동적인 한국의 특성을 살려 신기술의 테스트베드로 글로벌 기업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전향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허 교수는 “유턴법 등 국내로 돌아오는 기업에 혜택을 준다고 하는데 솔직히 실효성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지 않느냐”며 “정부가 노동 개혁 등을 통해 기업 환경, 기업이 사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신산업의 경우 관련 규제가 공백인 상태가 많은데 타다·원격의료 사례에서 보듯 규제 한 방에 사업을 접어야 할 수도 있다는 강박관념과 불확실성에 아이디어가 많은 기업인들이 고통 받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시욱 교수는 “우리나라만큼 소비자들의 반응 속도가 빠른 나라가 별로 없다”며 “신산업에 대한 테스트베드로 (한국이) 활용될 수 있도록 신산업에 한해서라도 규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韓소비자 트렌드 반응속도 빨라
'네거티브 규제'로 환경 조성하면
신기술 테스트베드로 활용될 것
해외선 삼성·현대차와 협업 관심
국내 기업에 대한 정부지원 늘려
'사업하기 좋은 韓' 적극 홍보하길
이학노 동국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국내 기업의 투자와 육성을 강조했다. 그는 “결국 해외에서 국내에 투자하는 이유는 삼성·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같은 기업들이 한국에 남아 계속 사업을 하기 때문”이라며 “이들 기업이 밸류체인을 만들고 해외 투자도 끌어오는 것인 만큼 이들 기업에 대한 지원도 강화하고 새로운 글로벌 기업도 만들어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정부가 장기적 성장 전략을 제시하고 해외 기업이 믿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해외에서 하는 지원 방안 역시 참조할 필요가 있다. 대외경제연구원이 발간한 ‘주요 선진국의 외국인직접투자 정책변화와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홍콩과 싱가포르는 방대한 현금 지원으로 해외투자를 유치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현금 지원은 특히 규모와 익명성으로 유명하다. 이학노 교수는 “싱가포르에 진출한 한 기업에 ‘왜 한국 대신 싱가포르로 갔느냐’고 물었는데 ‘공개되지 않은 지원을 정말 많이 받았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말했다. 반면 우리의 경우 현금 지원 제도가 도입돼 있기는 하지만 운영 면에서 제약이 있고 홍콩·싱가포르처럼 폭넓게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정 교수는 “결국 미국도, 영국도, 일본도 투자 유치 정책의 핵심은 보조금”이라고 짚었다.
싱가포르는 여기에 P&G의 사례처럼 국가가 먼저 ‘기업 맞춤형 솔루션’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시욱 교수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는 가만히 앉아 물고기가 잡히기를 바라는 식의 투자는 어렵다”며 “상대방 기업의 경영 여건이나 기술을 보고 역제안하는 적극적인 투자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싱가포르는 P&G의 투자 유치 이후에도 ‘무엇을 원하는지’ 끊임없이 묻고 원하는 전문가를 키우거나 데려왔다. 기업이 필요한 인재 육성을 위해 대학 커리큘럼도 쉽게 바꿨다. 수도권 공대 인원 증설도 쉽지 않은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나라의 해외투자 역시 적극 권장해야 한다. 이시욱 교수는 “우리나라가 옛날에는 물건을 만들어 수출하는 상품 수지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해외직접투자로 벌어 들인 이익·배당을 국내로 들여오는 소득 수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며 “이는 한국의 국제적 경쟁력이 늘어났다는 의미이며 타 선진국들 역시 해외직접투자가 외국인 직접투자보다 높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탈중국 현상이 언제까지 지속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허 교수는 “‘차이나 엑소더스’는 30년은 갈 것”이라며 “중국 특유의 체제 리스크와 미국의 대중 규제에서 오는 리스크가 중첩돼 중국 시장의 안정성이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정 교수 역시 “기술 수준이 높을수록 중국에서의 비즈니스에 위협을 느낄 것”이라고 봤다. 반면 이학노 교수는 “외국 기업들이 중국에 갔던 이유가 있다”며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역시 시장의 흐름을 정부가 인위적으로 막아 세우는 것이라 효과가 얼마나 갈지는 미지수”라고 전했다. 이시욱 교수도 “19세기 영국은 지금 미국이 내세우는 조치보다 더 강하게 기술의 국외 유출을 막았는데 결국 실패했다”며 “단기적으로 성공할 수 있어도 미국이 중국을 배제한다고 배제될지는 잘 모르겠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