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 가치가 올 들어서 30%나 급락한 일본은 통화·외환 정책에 있어 진퇴양난에 빠져 있다. 급격한 엔저를 막기 위해 통화정책을 긴축으로 선회할 수도 있지만 경제 회복세가 미미한 데다 막대한 국가부채의 이자비용이 부담이다.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을 해도 보유한 달러만 소진할 뿐 환율의 방향을 돌리기도 힘든 상황이다.
일본이 엔화 가치 추락의 속도를 늦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미국처럼 통화정책을 긴축적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국가부채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259%(지난해 기준)로 세계 최대 수준인 일본 입장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다. 금리 인상으로 시중금리가 오르면 그만큼 정부가 내야 할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재무성에 따르면 금리가 1%포인트 오를 때 이자 부담은 2025년 기준 3조 7000억 엔(약 35조 원) 증가한다. 보유 달러를 시장에 풀고 엔화를 사들여 직접 시장 개입에 나서는 방안은 실효성이 크지 않다. 실제 지난달 일본 정부가 24년 만에 시장 개입에 나섰지만 환율은 일시적으로 하락한 후 다시 상승(엔화 가치 하락)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들의 구두 개입도 무용지물이다.
통상 엔화 약세는 일본 입장에서 수출 경쟁력 강화, 관광 수입 증대 등의 효과를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은 제조업체들의 해외 진출로 수출 증대 효과가 예전만 못한 데다 글로벌 수요 부진, 일본 관광의 ‘큰손’인 중국의 여행 제한 등으로 효과는 한정적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반면 수입 급증에 따른 무역적자 확대, 가계 생활비 부담 가중 등 눈앞의 문제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20일 재무성이 발표한 일본의 2022 회계연도 상반기(4~9월) 무역수지는 11조 75억 엔(약 105조 4900억 원) 적자로 비교 가능한 1979년 이후 반기 기준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수출액이 49조 5762억 엔으로 전년비 19.6% 늘어난 반면 에너지 가격 상승에 엔저까지 겹쳐 수입액은 60조 5837억 엔으로 44.5%나 급증한 탓이다. 생활비 부담도 가중되고 있다.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엔·달러 환율이 145엔을 유지하면 2인 이상 가구의 올해 월평균 지출액이 전년보다 8만 1674엔 증가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일각에서는 세계 최대 순채권국인 일본이 외환시장 개입을 위한 유동성 확보를 하기 위해 해외 자산 매각에 나서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들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최근 블룸버그통신은 일본이 보유한 미 국채가 8월 기준 1조 2000억 달러로 전월보다 345억 달러 감소해 3년래 최저치를 기록했다며 “일본이 달러 실탄을 확보하려고 보유한 미 국채를 팔 수 있다는 관측이 커졌다”고 분석했다. 일본은행(BOJ)은 27~28일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도 현재의 완화적 금융정책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