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긴축 흐름을 무시한 일본의 독불장군식 통화정책이 아시아 자본시장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아시아 자본시장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본 엔화가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여겨졌던 달러당 150엔을 돌파(가치 하락)하면서 아시아 통화 전반에서 글로벌 자금의 대규모 이탈을 초래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20일 블룸버그에 따르면 세계 3대 기축통화인 일본 엔화 가치가 올해 들어 30% 하락하며 주요 아시아 통화 중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중국 위안화(-13.6%)나 인도네시아 루피아화(-9.1%), 태국 밧화(-14.7%), 필리핀 페소화(15.7%)와 비교해 하락률이 두 배가 넘는다.
엔화 가치 하락의 표면적 원인은 일본과 미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 간 금리차다. 공격적인 금리 인상에 나선 미국과 달리 일본이 초저금리 및 엔저를 고집하고 있고 이로 인해 저금리로 자금을 빌려 고금리 자산에 투자하는 엔 캐리트레이드 자금이 몰려 엔화 가치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실제 19일(현지 시간) 미국 10년물 국채 수익률은 4.136%까지 오르며 2008년 7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정책에 민감한 미 2년물 국채는 11bp(1bp=0.01%포인트) 상승해 4.55%까지 상승했다.
엔화 약세를 용인해온 일본 정부도 급격한 엔화 약세가 위험하다고 판단해 개입에 나섰지만 결국 150엔 붕괴는 막지 못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달 직접 외환시장 개입에 나섰던 일본 재무당국이 최근 소리 소문 없이 엔화를 사들이는 ‘스텔스 개입’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지만 글로벌 자금 이탈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본은행(BOJ)도 이날 일본의 초저금리 정책에도 불구하고 10년물 국채금리가 정책 상한선인 0.25%를 넘어설 정도로 상승(국채 가격 하락)하자 긴급 채권 매입에 나섰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일본은행은 이날 10년~20년물 국채 1000억 엔, 5년~10년물 국채 1000억 엔 매입 방침을 밝혔다.
시장에서는 마지노선인 150엔이 붕괴된 만큼 엔화가 어느 선까지 추락할지 예단할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 경제가 저성장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다 가파른 엔저 여파로 최근 14개월 연속 무역적자를 기록하는 등 펀더멘털 자체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엔화 붕괴의 파장이 일본 경제만에 국한되지 않고 아시아 전체 통화를 끌어내릴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중국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긴축을 꺼리면서 아시아 2대 통화인 중국 위안화까지 동반 추락하고 있어 글로벌 시장에서는 아시아 통화 위기 재발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는 실정이다.
엔화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매매가 많은 통화이자 동남아시아 각국에 막대한 자본과 신용을 제공하는 통화이며, 중국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최대 교역 파트너로 위안화가 무역 거래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이 두 통화의 추락은 미국의 고금리로 가뜩이나 위축된 아시아 시장에서 글로벌 자금의 대거 이탈을 촉발할 수 있다고 시장 관계자들은 우려한다. 자산운용사 SPI애셋매니지먼트의 스티븐 이네스도 “아시아 외환시장에서 위안화 약세는 언제나 우려스러운 전조”라고 평가했다.
최근 엔화 가치와 다른 아시아 통화의 동조화 경향이 더 심해졌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엔화와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신흥국 통화지수의 120일간 상관계수는 지난달 0.9를 넘어 2015년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싱가포르 DBS그룹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타이무르 바이그는 “아시아 국가들에는 고금리보다 환율 급등(통화가치 하락)이 더 큰 위협”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아시아 통화의 약세에 베팅한 글로벌 자금의 이탈로 올 들어 지난달까지 대만 증시에서 440억 달러의 외국 자금이 유출됐으며 인도와 한국 증시에서도 각각 200억 달러, 137억 달러의 자금이 이탈했다. 인도네시아는 채권시장에서만 8억 2000만 달러가 빠져나갔다. 엔화 150엔 붕괴로 심리적 저지선이 사라진 만큼 추가 약세에 베팅한 글로벌 자금 이탈이 한층 가속화해 ‘통화가치 하락→자금 이탈→통화가치 추가 하락’이라는 악순환의 늪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미즈호은행의 비슈누 바라탄 경제전략 대표는 “위안화와 엔화는 큰 닻과 같아서 이들의 약세는 다른 아시아 통화를 불안정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브릭스(BRICs)’라는 용어의 창안자로 유명한 짐 오닐 전 골드만삭스 자산운용 회장은 “엔·달러 환율 150엔 등 특정 선이 뚫리면 아시아 외환위기와 같은 규모의 혼란이 올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