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요커의 아트레터]갤러리 물려준 84세 아버지가 '컴백'한 까닭

페이스ㅍ갤러리 창립자 어니 글림처
트라이베카에 실험적 ‘125뉴버리’ 개관
"젊은작가 발굴과 담론생성 기여하고파"

페이스갤러리 설립자 어니 글림처가 최근 현업에 복귀하며 연 '125 뉴버리' 개관전에서 오랜 동료이자 세계적인 미술가 키키 스미스의 미공개 작품들을 선보였다.

미술계에서는 탈세, 경영난, 법적 소송 등으로 잘나가던 유명 아트 딜러가 한순간 무너져내려 사라지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아트 딜러가 반세기 이상 활동하기 어려운 이유다. 페이스(Pace) 갤러리의 설립자 어니 글림처(Arne Glimcher)에게는 ‘남 얘기’다. 60여 년의 화려한 아트 딜러 경력을 가진 84세 노장이 실험적 신생 갤러리 ‘125 뉴버리(Newbury)’의 오너로 돌아왔다. 갤러리 이름은 21살의 청년 어니 글림처가 1960년 처음으로 갤러리를 연 보스턴 125 뉴버리 가(街)에서 따 왔다. 어니 글림처는 월세가 10억 원이 넘는 첼시의 화려한 페이스 (Pace) 본사 갤러리를 내버려 두고 왜 굳이 차이나타운과 트라이베카 경계에 125 뉴버리라는 새로운 아트 프로젝트 공간을 새로 만들었을까?


어니 글림처는 2000년대부터 중국 미술의 가능성을 눈여겨보고 10여년 동안 중국 진출에 힘써왔다. 하지만 악화돼가는 중국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중국 내 갤러리 운영이 어려워졌다. 2019년에 페이스갤러리 베이징 지점이 공식적으로 문을 닫은 이후, 어니 글림처는 자신의 아들 마크 글림처(Marc Glimcher)에게 갤러리의 실질적 경영권을 물려준 후 뒤로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몇 십 년에 걸쳐 쌓은 아트 딜러의 DNA가 쉽게 사라질 리 없었다. 그는 전시 기획에 대한 관심이 있었지만, 아들 마크 글림처 체제의 페이스갤러리에는 전시 공간이나 스케줄이 여의치 않았다.



뉴욕 맨해튼 트라이베카와 차이나타운 경계에 페이스갤러리 설립자 어니 글림처가 자신의 첫 갤러리 주소의 이름을 딴 '125 뉴버리(Newbury)'라는 새 공간을 열었다. 연간 5회 정도 젊은 예술가의 실험적 전시를 열 계획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어니는 자신의 아트 프로젝트 공간을 새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125 뉴버리’를 연 가장 큰 이유는 초심으로 돌아가서 지역 커뮤니티와 더 직접적인 소통을 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실제로 어니 글림처는 프런트 데스크에 직접 앉아, 방문객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더 보낼 계획이라고 한다. ‘프라이빗'을 추구하는 갤러리 비즈니스에서는 다소 파격적인 시도다.


그의 아들 마크 글림처 체제의 페이스 갤러리와 어떠한 차별적 행보를 보일지도 궁금하다. 최근 페이스 갤러리는 뉴욕 본사 확장을 시작으로 서울, LA 지점을 넓히는 등 많은 자본을 투자한 상태다. 이러한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갤러리는 수용할 수 있는 역량 이상으로, 현재 무분별할 정도로 전속 작가 계약을 맺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과거 어니 글림처의 페이스 갤러리는 수십년 간 아티스트와의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유명하다. 최근 베니스 비엔날레에 전시됐던 루이스 네벨슨(Louise Nevelson), 여성 추상표현 회화의 대가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을 비롯해 색면 추상의 대표적인 아티스트인 마크 로스코(Mark Rothko) 등 많은 작가들이 그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였다. 갤러리스트와의 지속적인 소통, 관심은 아티스트들이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끔 만들었다.



어니 글림처의 컴백 첫 개관전은 굵직한 예술가 17명이 참여한 그룹전 ‘산딸기(Wild Strawberries)’로 11월 19일까지 열린다.

어니 글림처가 마련한 새 공간에서 페이스의 DNA가 부활할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 개관 전시로 17명의 그룹전 ‘산딸기 (Wild Strawberries)’가 11월 19일까지 열린다. 글림처와 함께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키키 스미스(Kiki Smith), 루카스 사마라스(Lucas Samaras), 장 환(Zhang Huan), 린다 벵글리스(Lynda Benglis), 데이비드 하몬스(David Hammons) 와 같은 아티스트뿐만 아니라 젊은 블루칩 아티스트인 줄리 커티스(Julie Curtiss)와 알렉사 다 코르트(Alexa Da Corte) 같은 작가들이 포함됐다. 작가가 소장해 온 탓에 그간 공개된 적 없는 키키 스미스의 90년대 인체 조각 작품 ‘Ice Man’(1995)과 ‘Virgin Mary’(1992)가 이목을 끈다. 루카스 사마리스가 1960년대 작업했던 작은 소품 조각들과 블루칩 여성 아티스트 줄리 커티스의 신작을 함께 보는 경험은 시·공간을 초월한 아티스트의 철학을 들여다볼 기회를 선사한다.



어니 글림처의 '125뉴버리(Newbury)'는 1층과 지하로 나뉘는데, 지하에는 사무실 겸 고객 응접실이 자리잡고 있다. 첼시에 위치한 페이스갤러리 본사의 화려함과 달리 미니멀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125 뉴버리’는 앞으로 어니 글림처 외 3명의 디렉터 및 큐레이터 체제로 ‘작게’ 운영될 예정이라 한다. 젊고 유망한 아티스트들의 그룹전 및 개인전을 연 5회 정도 열 계획이다. 이곳 트라이베카는 팬데믹 기간 동안 많은 미들급 갤러리들이 옮겨와 새로운 아트 신을 형성하여 부상한 지역이다. 페이스갤러리처럼 ‘메가급 갤러리’인 데이비드 즈워너(David Zwirner) 또한 지난해 ‘52 Walker’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새로운 아트 프로젝트 공간을 만들었다. 이외에도 주변에는 미들급이지만 탄탄한 아티스트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는 캐나다(CANADA) 갤러리, P.P.O.W 갤러리, 앤드류 크랩스(Andrew Kreps) 갤러리, 멘데스 우드(Mendes Wood) DM 갤러리 등이 위치하고 있다. /글·사진(뉴욕)=엄태근 아트컨설턴트



※필자 엄태근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를 졸업하고 뉴욕 크리스티 에듀케이션에서 아트비즈니스 석사를 마친 후 경매회사 크리스티 뉴욕에서 근무했다. 현지 갤러리에서 미술 현장을 경험하며 뉴욕이 터전이 되었기에 여전히 그곳 미술계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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