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대표적 외교정책 슬로건은 “중산층을 위한 외교(Foreign Policy for the Middle Class)”다. 워싱턴의 엘리트들이 선호하는 외교정책이라도 평범한 미국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성공하기 어렵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정무적 판단이 반영된 정치성 구호이기도 하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추진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여야 모두의 지지를 받던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이었다. 워싱턴의 엘리트층은 TPP를 지지했지만 정작 미국 국민은 자유무역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 자유무역으로 인해 일자리가 해외로 떠나고 중산층과 노동자 계층은 상대적으로 더 빈곤해졌다는 인식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이러한 기류를 감지하지 못한 채 TPP를 추진했다. 엘리트들이 공히 지지하고 있던 정책이어서 국민과의 교감을 소홀히 한 부분도 있었다. 그 결과 2016년 미 대선에서 TPP 철회를 공약으로 들고 나온 도널드 트럼프가 돌풍을 일으키며 승리를 거머쥐었다. 트럼프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실제로 TPP를 폐기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가 훼손한 동맹을 복원하고, 트럼프가 탈퇴한 국제 제도에도 재가입해 미국의 외교 자산으로 활용하려 한다. 그러면서 미국의 리더십을 회복해 국제 질서를 관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문제는 “미국 우선주의”가 여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누구인가. 화려한 언변과 카리스마는 부족해도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의 정치인이다. 자신의 외교정책이 가져올 국내 정치적 파장에 대한 계산이 빠르고, 무엇보다 국민 눈높이에서 외교정책을 추진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미국의 엘리트들이야 동맹을 지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미국인은 “왜 미국이 한국과 같은 부자 나라를 지켜줘야 하냐”는 트럼프의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이 처음 공식 방한하면 으레 비무장지대(DMZ) 방문으로 일정을 시작한다. 5월 한미 정상회담 차 방한한 바이든 대통령은 공식 일정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의 면담으로 시작해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과의 면담으로 마쳤다. 면담에서 대규모 미국 투자 약속을 받아냈음은 물론이고 미국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이제 한국의 안보만 부각되는 한미 동맹으로는 미국 국민의 지지를 끌어내기 어렵다. 미국에 가시적인 이익으로 환원되는 동맹이어야 하고, 바이든 대통령은 이러한 정치 현실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아마 한국의 식자층 대부분은 윤석열 정부의 외교 노선이 올바른 방향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을 것이다. 아시아 최고의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은 지금 거센 도전을 받는 자유주의 국제 질서 수호·강화에 더 공헌해야 한다. 한국이 전쟁의 잿더미에서 우뚝 설 수 있었던 데는 국제사회의 지원이 일정 기여를 했다. 이제 한국이 어려운 나라를 돕는 ‘글로벌 펀드’에 적극 기여하는 것이 맞다. 미국과의 관계도 더 강화하고 일본과의 관계도 조속히 복원해야 한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이러한 정책을 국민과 눈높이를 맞춰가며 추진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세계의 자유·평화·번영에 이바지하는 ‘가치외교’도 결국 한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니 하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한국의 가치외교가 어떻게 한국의 국익으로 환원되는지 국민에게 설명하며 지지를 유도해야 한다. 한국의 도덕적 책무만 강조하는 가치외교는 고물가 시대를 사는 국민에게 다소 공허하게 들릴 수 있다. 21세기 한국 국민은 높아진 국가의 위상만큼이나 자긍심이 높다. 전후 사정이야 있었겠지만 대한민국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과 일본 총리를 만나려 사방팔방 쫓아다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면 국민의 자존심에 상처가 나고 야당은 이를 “48초 회동” “스토킹 회동”이라 하며 정치적으로 악용할 것이다. 정무적 고려 없이 직진하는 외교 스타일 때문에 오히려 윤석열 외교에 급제동이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