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한국 현대미술은 어디에서 왔을까? 한반도 예술의 전통은 삼국시대의 다양성 시대를 지나 고려, 조선을 거쳤고 개화기 격변의 물결 속에 서양미술을 빠른 속도로 받아들였다. 자칫 전통미술과 현대예술이 단절됐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중구 덕수궁길 옛 구세군중앙회관에서 재개관 한 두손갤러리의 기획전 ‘한국미술의 서사(A Narrative of Korean Art)’에서 그 연결고리를 확인할 수 있다.
마포에 유백색 물감을 칠한 후 마르기 전에 연필 긋기를 반복한 박서보의 1970년대 초기 ‘묘법 No. 223-85’는 도자기에 화장하듯 백토를 발라 무늬를 새긴 조선 초 ‘분청사기’와 흡사하다. 중기 묘법이자 ‘지그재그 묘법’이라 불리는 1980년대 작품 ‘묘법 No. 88927’은 물에 불린 후 겹쳐 바른 한지가 마르기 전에 지그재그로 긋기를 반복해 완성됐다. 즉흥적이고 과감하지만 작가가 설정한 규율이 분명하고 절제미가 뛰어나다. 폭 4m의 1000호 짜리 이 대작은 18~19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어필(御筆) 책장’을 마주하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김양수 두손갤러리 대표가 “단정한 책장에 과감하게 쓴 어필이 정조의 서체라고들 이야기 한다”고 귀띔했다. 연못에 묻힌 구슬이나 산에 숨은 옥이 스스로 빛을 발한다는 주자의 글귀를 적었는데, 당대 최고의 스승에게 서예를 배운 왕의 글씨답게 힘찬 명필이다. 어필과 지그재그 묘법의 강렬한 공명 가운데 작가 이수경의 ‘번역된 도자기’가 놓였다. 굽다가 터져버린 달항아리와 백자 조각들을 금박으로 이어붙인 작품이다. 조선의 자기가 현대미술로 부활했다.
작품이 보여주듯 ‘K아트’의 독특한 DNA는 전통의 요소를 계승하되 자신만의 독특한 어법을 만들어내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고미술과 현대미술을 함께 전시하면서 내용적 맥락을 꿰뚫었다는 점이 이번 전시의 특별함이다. 동시에 작품들이 서로를 더 돋보이게 떠받친다. 박서보의 붉은 후기 ‘묘법’ 옆에 놓인 권진규의 1967년작 잿빛 흉상 ‘여사제(Priestess)’는 알베르토 자코메티 못지 않은 실존의 의미를 읊는다. 이우환의 작품은 백자와 고가구, 혹은 다완과 어우러지며 윤형근의 그림은 ‘철화문병’ 사이에서 더 빛난다. 서세옥·윤명로·심문섭·엄태정·최명영·전광영 등 선 굵은 작가들이 ‘한국미술’의 맥락 속에서 어우러진다.
두손갤러리는 1969년 고미술상으로 출발해 1977년부터 현대미술 전시를 시작한 대표적 1세대 화랑이다.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 해외 거장들을 처음 국내에 소개한 것으로도 유명했지만 1992년 문을 닫았다. 이번 전시는 30년 만에 재개관한 두손갤러리의 두 번째 기획전이다. 김양수 대표는 “그 어느때보다 한국미술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높은 지금이 우리 정체성에 대한 인문학적, 미학적으로 접근이 필요한 때”라며 “고려 청자,고미술 목기, 금속 공예부터 단색화와 추상미술,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까지 넘나들며 한국 미술만의 독특한 창의성을 보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11월26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