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랜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사태 이후 단기자금시장 경색 위기가 커지고 있다. 사태 진정을 위해 정부가 지난 23일 50조 원이 넘는 유동성 공급 조치를 내놓았지만 시장은 대책 효과가 나타나기도 전에 ‘최종대부자’인 한국은행이 직접 등판하길 원하고 있다. 레고랜드 사태가 촉발하긴 했지만 지난해 8월부터 이어진 가파른 기준금리 인상이 채권시장을 얼어붙게 한 근본적 원인이라는 것이다. 유동성 공급 확대 없이는 이번 위기를 넘길 수 없다는 목소리를 강하게 내고 있다.
하지만 한은은 현행 금리 인상 기조와 상충하는 유동성 확대 정책을 내놓을 수 없다며 맞서고 있다. 통화정책 방향에 벗어나지 않은 조치는 마침 27일 열리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논의하겠지만 유동성을 추가로 공급하는 것은 전혀 성격이 다른 문제라는 입장이다. 따라서 한은이 추진하려는 정책과 시장에서 요구하는 정책 간 괴리도 커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한은 안팎에서는 시장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중앙은행이 직접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반응마저 나온다.
시장에서 요구하는 한은의 유동성 공급 방안은 ① 저신용등급을 포함한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을 위한 기업유동성지원기구(SPV) 재가동 ② 무제한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 ③ 금융안정특별대출 등 크게 세 가지로 꼽을 수 있다. 지난 18일 나재철 금융투자협회장은 이창용 총재를 직접 만나 금융안정특별대출 재가동을 요청했다. 이 총재가 참석하기로 한 26일 은행연합회 간담회에서도 이같은 요청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안재균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고물가 대응 상황에서 대규모 유동성 공급은 다소 부담일 수 있다”면서도 “그러나 한국 금융발전 정도를 감안하면 현재의 금융환경 위축에 적극 대응할 필요성이 높고, 새로운 통화정책 조합(영란은행과 같은 금리 인상 속 자산매입 재개)의 사용은 한국에도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김성수 한화투자증권 연구원도 “23일 정부 대책은 단기적으로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면서도 “그럼에도 한은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대책의 효과는 제한적일 것으로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일부 정치권과 정부 부처에서도 한은 역할론을 내세우고 있다. 24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국은행이 적격 RP 매입 대상을 확대하고 비은행 금융 대출을 해줄 필요가 있으며 SPV를 금융기관까지 포함해서 재가동할 필요도 있다”고 하자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지적한 내용에 대부분 동의한다”고 답변한 것이다. 김 위원장은 “채권시장안정펀드는 금융기관 재원이기에 한계가 있고 이는 한국은행도 알고 있는 만큼 조만간 금통위가 열릴 것으로 아는데 현재 시점에서 한은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할 것이라고 이해한다”고 덧붙였다.
김 위원장 발언대로 한은은 27일로 예정된 금통위에서 대출 적격담보증권 대상을 은행채와 공공기관 발행채권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의결할 것으로 보인다. 금통위원들은 25일 오전 위원협의회를 통해 한은 대출 적격담보증권 확대 등을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금융중개지원대출 등 각종 한은 대출과 관련된 담보증권에 국채와 통화안정증권(통안채)만 포함되던 것을 은행채와 한전채 등 공공기관 발행채권을 포함하는 방안이 유력하다.
그렇게 되면 은행은 한은에 담보로 제공했던 국고채와 통안채 대신 은행채와 공공기관채를 맡길 수 있다. 돌려받은 국고채와 통안채는 파생상품 증거금 등 다른 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만큼 자체적으로 자산 재배분을 할 수 있고 시중 자금이 쏠리는 은행채 발행도 멈출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SPV, 무제한 RP 매입, 금융안정특별대출 등은 이 총재가 계속 언급했듯이 이번 금통위에서 의결하긴 어려워 보인다. 이 총재는 24일 국회에서 “금융안정대출이나 SPV 재가동을 추후 논의할 수는 있지만 지금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정책”이라고 했다. 그는 “현 상황에선 증권사를 중심으로 CP 시장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은행은 파이낸싱(자금조달)에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럴 단계는 아니다”라며 “처음에 너무 과도한 약을 쓸 수 없다. 대책은 타이밍이 있기 때문에 필요할 때 하겠다”고 말했다.
적격담보증권 대상 확대를 적극 검토하면서도 SPV 재가동 등 시장 요구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는 이유는 각 정책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한은이 신규 유동성을 공급하는지가 주요 판단 기준이다. 한은 관계자는 “적격담보증권 대상을 확대하면 은행 입장에서는 담보 교체로 자원을 재분배하는 효과를 보게 되지만 유동성을 추가 공급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라며 “반대로 SPV를 가동하려면 금통위가 신규 대출을 해야 하기 때문에 유동성이 공급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적격담보증권 대상 확대는 유동성을 새롭게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자금 순환을 원활하게 하자는 취지의 정책이라는 것이다. 금융 당국이 은행 통합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규제 정상화 조치를 6개월 연장하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설명이다. LCR은 향후 30일간 예상되는 순현금 유출액 대비 고유동성 자산 비율을 말한다. 코로나19 당시 은행 통합 LCR을 기존 100%에서 85%로 인하하기로 했다가 정상화를 추진 중인데 오는 12월까지 92.5%로 맞춰야 하는 것을 내년 6월 말까지로 미룬 것이다. 은행들이 LCR 규제 충족을 위해 발행해오던 은행채를 발행하지 않으면 다른 채권에 숨통이 틜 것이란 기대다. 여기에 당국의 채안펀드, 회사채·CP 매입 확대, 증권사 유동성 지원, 채권담보부증권(P-CBO) 공급 확대, 지방자치단체의 보증 확약 등 각종 시장안정조치들도 불을 꺼보겠다는 심산이다.
금리 문제는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미 시장에서는 11월 빅스텝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이 총재는 23일 대책 발표 당시 “이번 시장안정조치는 신용 경계감이 높아진 데 따른 미시 조치”라며 “거시적 통화정책과 배치되거나 전제가 바뀌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번 사태가 통화정책 판단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미리 선을 그은 것이다.
그런 가운데 한은이 가장 중요하게 보는 기대인플레이션이 3개월 만에 상승 전환한 것은 주목해야 할 지표다. 이번 레고랜드 사태보다는 다음 달 1~2일(현지시간)로 예정된 미국 연방준비제도(Feb·연준)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변수다. 미 연준이 4연속 자이언트스텝(금리 0.75%포인트 인상)에 나서고도 강한 긴축을 예고한다면 한은으로서는 빅스텝이 불가피하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한은이 기준금리 인상을 통해 유동성을 축소하고 있는데 여기서 유동성을 공급하게 되면 기존 대책과 상충하게 된다”라며 “기준금리를 올리는 효과가 반감되면 물가는 잡지 못하고 부작용만 커질 수 있기 때문에 가급적 통화정책의 큰 틀은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 ‘조지원의 BOK리포트’는 국내외 경제 흐름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도록 한국은행을 중심으로 경제학계 전반의 소식을 전하는 연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