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과 정책 당국자들이 하는 일을 보면 생각보다 한국경제가 더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 정치인들의 이상한 짓과 정책 당국자들의 안이한 대처가 계속된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위기도 오게 된다.”
한국은행 금융안정분석국장을 지낸 정대영 송현경제연구소장이 31일 ‘한국경제의 위기징후와 대응방안’ 자료를 내고 우리 경제 위기 가능성에 대해 강하게 경고했다. 송현경제연구소는 한은 출신 경제 전문가들로 구성된 민간 싱크탱크로 정 소장을 비롯해 박이락 전 금융결제국장 등 한은 국장급 인사들이 참여한 조직이다. 정 소장은 한은 프랑크푸르트 사무소장,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이날 정 소장은 “현재 한국경제 상황은 대체로 1997년보다 좋지만 2008년보다 나쁜 듯하다”라며 “특히 가계부채가 크게 늘었고 부동산 거품이 더 심한 데다 수출입여건이 악화되고 있어 경상수지 흑자 기조도 위협받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날 정 소장은 외환당국, 금융감독당국, 통화당국 등으로 나눠 필요한 정책을 강조했다. 먼저 외환당국은 미국과의 통화스와프를 기대하면서 외환보유액을 조금씩 소진하며 달러화 강세가 멈추기만을 기다리고 있어 답답하다고 꼬집었다. 그는 “달러화 강세가 장기화되거나 우크라이나 전쟁, 대만 병합 등 지정학적 위험 악화로 충격이 온다면 원화 환율이 폭등할 수 있다”며 “외환위기는 국가 부도 상태와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최악의 상태를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외환위기를 대비하려면 우리나라가 순대외채권국인 만큼 해외로 나간 풀뿌리 외환보유액을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려면 기업과 개인이 해외 투자한 자금을 국내로 들어오게 할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 소장은 “1997년 금 모으기 운동과 같이 애국심에만 호소해서는 안 된다”라며 “당시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했던 다수의 국민은 자신들이 배신을 당하고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어 두 번 속이기 쉽지 않다”고 꼬집었다.
정 소장은 “팔리지 않는 채권과 가격이 크게 떨어진 주식을 매입하는 위기 대응 특별펀드를 조성하고 이 펀드에 해외에서 돈을 들여와 일정 기간 이상 투자하는 경우 비과세해야 한다”라며 “이 정책으로 환율 안정 효과, 채권시장과 주식시장 안정효과, 국내 주식시장의 내국인투자 비중 증대효과 등 기대효과가 아주 많다”고 강조했다.
금융위원회나 금융감독원 등 금융감독당국도 한은에만 기대지 말고 본래 해야 할 건전성 검사에 충실하라는 조언이다. 2008년 12월 당시 시행한 채권시장안정펀드와 비슷한 정책을 만들고 한은의 자금 지원을 요구하는데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당시보다 금융기관 건전성에 대한 의심이 나오고 있으며 한은의 정책 기조도 물가 안정을 위해 유동성을 환수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금융감독당국은 자신의 본분인 금융기관 건전성 감독을 확실히 하고 옥석을 가려 문제가 없는 증권사마저 유동성 위험에 처하게 되는 최악의 상태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 소장은 “증권사의 PF 금융과 보유 외화자산의 건전성을 정밀 검사해 개별 증권사의 생존 가능성을 평가하고 이를 공개해야 한다”라며 “자본적정성이 훼손된 증권사에 대해서는 대주주에게 자본 확충을 요구하고, 안 되는 경우 인수합병 등 구조조정을 선제적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통화당국에 대해서는 그간 집값 폭등과 가계부채 누증의 핵심 원인이 과도한 저금리 정책이었음을 반성부터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정 소장은 “한국은행권인 돈의 실질 가치를 지켜 다수 국민이 재산상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해야 한다”라며 “물가가 확실히 안정될 때까지 긴축 기조를 유지하고, 소비자물가지수에는 미국과 같이 집값이 반영되도록 통계청에 요구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한은은 빚내서 집 사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통화정책을 운용해 신뢰가 충분치 못하다며 “지금부터라도 경제주체들의 이익에 중립적인 통화정책을 수행해 신뢰를 높여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