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다랗게 피어오른 뭉게구름이라 생각하며 운치있는 하늘을 떠올렸다. 이불솜처럼 새하얀 구름이 신비한 보랏빛으로 번져가는 작품은 50×60㎝ 크기의 작은 그림 108조각으로 이뤄져 있다. 폭만 10m 이상인 초대형 그림의 제목은 ‘풍경-아이러니’.
“굉장히 유명한 보도사진인데 못 알아보시겠어요? 2001년 9월11일 뉴욕에서 일어난 항공기 납치 테러사건 ‘9·11테러’를 보도한 사진을 그린 거예요. 불길에 휩싸인 빌딩 부분을 잘라내고 그렸어요. 오른쪽 끝에 불 기운이 조금 보입니다.”
은평구 사비나미술관에서 개인전 ‘비스듬히 떨어지는 풍경-재난, 가족’을 열고 있는 현대미술가 홍순명(63)이 말했다. 아름답다고 착각했던 그 풍경의 실체는 ‘재난’이었다.
가을이라는 계절은 그 옆에 걸린 샛노란 풍경도 단풍이 절정으로 물든 산이라 느끼게 했다. 사실은 태풍으로 뒤집힌 해운대 앞바다였다. 홍 작가는 “노란색은 가벼우면서도 불길하고 불안한 느낌을 주는 색이라 여겨 푸른 바다를 노랗게 그렸다”고 설명했다. ‘바다-태풍’이라는 제목을 확인한 후 다시 보면 그제서야 성난 물길이 감지된다. 노을같이 보였던 붉은 그림 ‘불’은 2017년 호주에 발생했던 대규모 산불 사진을 토대로 했다. 심상용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는 이번 전시에 대한 평론글에서 “잘못된 것은 세계가 아니라, 세계를 부단히 잘못 읽는 ‘나’다. 오염된 것은 세계가 아니라, 세계를 보는 나의 시선이다”라고 썼다.
개념미술과 설치작업으로 유명했던 홍순명 작가는 2002년 무렵부터 ‘사이드스케이프(sidescape)’라고 명명한 자신만의 “비켜난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어떤 큰 사건이 벌어져 주목을 끌 때, 우리가 미처 못 본 그 주변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에 주목해 그리기 시작한 회화”라며 “큰 사건에 비해 작다고 치부된, 그렇지만 그 일을 당한 개인들에게는 엄청난 일들에 대해 눈여겨 보게 됐다”고 말했다. 인간의 이성, 일상적 습관, 합리적 사고를 벗어난 것은 무엇이든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햇빛이 쨍하면 따뜻해서 좋다 하고 보슬비 내리는 날 분위기가 좋다고 말하지만 이것이 어떤 상황에서는 가뭄이나 홍수로 돌변해 ‘재난’으로 바뀌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시장 2층에서는 대규모 재난 풍경이 펼쳐지고, 3층에서는 작가가 직접 경험한 가족 간 세대 갈등을 소재로 한 ‘흔한 믿음, 익숙한 오해’ 연작이 선보였다. 작가가 어머니의 앨범에서 발견한 어머니나 가족의 이미지를 빛바랜 흑백 사진 같은 느낌으로 그린 다음, 그 위에 1932년부터 1985년 사이에 한국에서 벌어졌던 다음 세대의 사건들을 그리는 식이다. 독창적인 ‘이중회화’ 기법은 물놀이 장면, 관광지에서의 추억을 낯설게 보게 한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누구나 겪을 법한 일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묵직하게 다가오는 그림들이다. 전시는 2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