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일우에게 영화 '고속도로 가족'은 터닝 포인트다. 새로운 캐릭터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그의 목마름을 해소해 줬고, 관객에게 변신한 얼굴을 선보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노숙인으로 변신한 정일우의 낯선 얼굴부터 극으로 치닫는 감정 연기까지 신선한 충격으로 가득 차 있다.
'고속도로 가족'(감독 이상문)은 인생은 놀이, 삶은 여행처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살아가는 기우(정일우)네 가족이 우연히 영선(라미란), 도환(백현진) 부부를 만나면서 예기치 못한 사건을 겪게 되는 이야기다. 믿었던 사람의 배신으로 인해 가족을 데리고 길거리에 몰린 기우는 휴게소 방문객에게 2만 원을 빌리며 생계를 유지하다. 그럼에도 그는 가족과 함께라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중 영선이 신고로 가족과 이별하게 된 그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간 드라마에서 주로 활약한 정일우는 '고속도로 가족'을 통해 13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했다. 꾸준히 영화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그는 '고속도로 가족'의 시나리오를 읽고 선물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특히 오랜만에 돌아온 만큼 오랜만의 돌아온 만큼 일반적이지 않은 캐릭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그에게 기우 캐릭터는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일주일 동안 지옥 같은 마음이 들었죠. '내가 왜 한다고 했을까?'라는 두려움과 기우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 두 번 다시 영화를 하지 못할 것 같은 무서움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감독님을 뵙고 '못 하겠다'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기우는 선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캐릭터로 아이처럼 순수하다는 감독님의 말에 설득됐죠."
기우는 극 초반과 후반이 명확하게 갈리는 캐릭터다. 초반에는 비록 길거리 생활임에도 가족과 함께해 행복하고 천진한 모습이 주를 이룬다. 후반에 들어서면 다시 가족을 찾기 위한 몸부림과 이를 거부당하자 마음의 아픔이 오면서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지는 모습이다. 정일우는 극명하게 갈리는 기우의 감정선을 표현하기 위해 시나리오 자체에 집중했다.
"초반에는 최대한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려고 했어요. 아이들과 스킨십도 많이 하면서 친해지는 게 우선이었죠. 감독님이 이때 기우를 '거침없이 하이킥'의 윤호처럼 표현해달라고 하시더라고요. 힘들게 살아가지만, 우리 안의 가장 큰 행복은 가정이라는 메시지가 있는데, 이걸 극대화하려면 윤호처럼 해맑아야 된다고요."
"영선이 경찰에 신고하고 난 다음부터 아픔이 발현되는데, 확 변하잖아요. 그럼에도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대가 있다가, 그럴 수 없다는 것에 충격받고 분노하고 좌절해요. 육체적으로 힘든 건 개의치 않는데, 감정선을 계속 끌고 가야 되는 건 정신적으로 힘들었어요. 기우가 후반에 들어서서 혼자 외톨이처럼 떨어져 지내는데, 저도 그 시간 동안만큼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했죠. 이 시간들이 결국 절 기우로 만들어줬어요."
정일우는 기우의 정신적 아픔을 표현하기 위해서 정신과 선생님을 찾아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그는 다양한 아픔이 발현되는 병에 대해 공부했는데, 조증으로 기분이 굉장히 좋을 때가 있고 두통이 오는 증상이 있단 걸 알게 됐다.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될지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민했다.
"가족이 전부인 기우는 아내 지숙(김슬기)과 이별하고 난 다음부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됐어요. 살아갈 이유가 무너졌기에 증상 자체가 극에 치달을 거라고 생각했죠. 기우에게는 허기짐이 항상 따라다니는데, 누구도 이 공허함을 채워줄 수 없기에 마트에서 마구잡이로 먹어요. 진흙을 얼굴에 바르는 행동도 환청이 들리면서 다다른 거예요."
이렇게 기우로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이미 캐릭터에 동화돼 있었기에 체감하지 못한 그는 관객 반응을 들어보면서 뿌듯함을 느꼈다. 반듯한 캐릭터를 주로 맡았던 정일우의 노숙인 연기는 관객에게도 파격적일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본 분들이 하나같이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저인 줄 몰랐다고 하시는데, 기분이 정말 좋았습니다. 전작을 같이 했던 배우 권유리와 송상은이 보러 왔는데 '미쳤다. 이렇게 연기할 줄 몰랐다'고 했어요. 상상했던 이상의 반응이라 저도 깜짝 놀랐죠. 역시 '고속도로 가족'을 선택한 건 잘한 일이에요."(웃음)
일각에서는 이토록 가족을 사랑하는 기우가 어떻게 가족을 길거리로 내몰 수 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휴게소에서 2만 원을 빌릴 때도 아이들과 함께해 이용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오해의 소지도 있었다. 정일우는 반감을 살 수 있는 부분을 인지하고 있다고 말하며 기우가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드러내려고 노력했다고.
"저도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어요. 그래서 감독님과 더 이야기를 많이 나눴고요. 2만 원 빌릴 때 아이들이 있는 건 중간에 아빠를 도와주러 왔기 때문이에요. 그런 부분을 타협했고, 치열하게 설득하고 설득 당했죠."
"작품을 시작할 때 기우가 빌런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지숙에게 다시 찾아가서 함께하자고 하잖아요. 굳이 따뜻한 밥 먹고 사는 가족에게 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싶었죠. 그런데 기우가 이렇게 된 건 사회적으로 버림받았기 때문이에요. 그 와중에 가족을 보호해야 된다는 마음이 컸던 기우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진한 감정 연기를 한 만큼 여운도 오래갔다. 촬영한 지 일 년이 지났지만, 정일우는 영화를 보니 그때의 감정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캐릭터에 몰입하고 치열하게 촬영한 기억이 있기에 막상 떠나보내려고 하니 허망한 마음이 든 거다. 이 마음을 딛고 그는 새로운 작품에서 또 변화할 자신의 모습을 기대한다.
"10년 전부터 이런 캐릭터를 해보고 싶었어요. 전 항상 다른 캐릭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이 작품을 통해 대중, 관계자들도 이제는 알았을 거예요. 앞으로는 더 다양한 캐릭터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극으로 치닫는 캐릭터가 아니더라도 지질한 캐릭터나 악역도 하고 싶어요. 연기의 폭을 더 넓히고 싶은 바람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