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크런(대량 예금 인출)’에 빠진 암호화폐거래소 FTX를 인수하겠다던 바이낸스가 인수 계획을 철회하며 암호화폐 시장이 패닉에 빠졌다. FTX는 파산 위기로까지 몰리고 있다. 바이낸스가 인수를 위한 구속력 없는 의향서(LOI)를 작성하고 FTX 실사에 나서겠다고 밝힌 지 하루 만에 이를 철회하며 암호화폐 시장 투자자들의 손실도 불가피해졌다. 월가에서는 이번 사태가 사실상 미중 코인 전쟁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일단 1차전은 중국의 우세승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10일 암호화폐 업계에 따르면 9일(현지 시간) 바이낸스는 트위터를 통해 “기업 실사와 고객 자금에 대한 잘못된 관리, 미국 관계 기관의 조사 소식 등을 고려해 우리는 FTX닷컴에 대한 잠재적인 인수 작업을 추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애초 우리의 희망은 유동성을 지원해 FTX 고객들을 돕는 것이었지만 현재 상황은 우리가 통제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 밖에 있다”고 설명했다. 재무제표상에서 확인된 부실이 생각보다 크거나 또는 현시점에서 확인할 수 없는 정보를 고려할 때 인수 이후 당국의 법적 제재 등 추가적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대표적인 암호화폐거래소이자 세계 3위인 FTX가 유동성 위기에 빠진 것은 FTX가 자사주 격인 ‘FTX토큰(FTT)’을 발행하고 계열사가 이를 사들이는 구조로 몸집을 키웠다는 문제 제기로부터 시작됐다. 불안을 느낀 투자자들은 FTX에서 돈을 빼기 시작했고 바이낸스가 자신들이 보유한 8000억 원 상당의 FTT를 전량 매도하겠다고 밝히면서 시장의 공포감은 확산됐다. 결국 바이낸스의 ‘매도 공격’에 이어 인수 의사 철회로 FTX의 기업가치는 320억 달러(약 44조 원)에서 0달러로 추락하며 존립 여부 자체가 불투명해졌다. 업계의 연쇄 부실화 가능성도 높아지면서 시장은 패닉에 빠졌다. 비트코인 가격은 9일 한때 약 2년 만에 1만 6000달러 밑으로 떨어졌다. 같은 날 FTT는 사건 발생 전인 7일 대비 90.7% 폭락한 2.30달러까지 주저앉았다.
블룸버그는 관계자 발언을 인용해 현재 FTX가 필요한 자금이 최대 80억 달러, 최소 40억 달러 수준이라고 전했다. 샘 뱅크먼프리드 FTX 최고경영자(CEO)가 외부 투자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80억 달러의 유동성 부족에 직면했으며 유동성을 유지하려면 40억 달러는 필요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FTX가 지난 2년간 투자자들에게 유치 받은 자금이 14억 달러 수준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바이낸스의 인수가 무산된 이상 단기간에 이 정도 규모를 확보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대체적인 전망이다. 뉴욕타임스(NYT)는 “바이낸스와 FTX의 거래 무산은 FTX의 미래뿐 아니라 암호화폐 비즈니스에 실존적 위협”이라며 “암호화폐 업계의 리먼 모먼트”라고 평가했다. FTX 파산에 따른 위험을 세계 금융위기를 촉발한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에 빗댄 모습이다.
실제 FTX의 파산이 가시화하면 장기적으로 암호화폐 시장도 성장에 구조적인 악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암호화폐 시장에 대한 미 월가와 규제 기관, 주류 투자자들의 신뢰가 다시 한 번 무너진 데 따른 후폭풍이 그만큼 클 것이라는 얘기다. 비트와이즈애셋매니지먼트의 최고투자책임자(CIO)인 매슈 호건은 “이 정도의 이벤트는 단기적으로는 투매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시장을 침체로 몰아넣는다”며 “수개월가량의 시간이 지난 후에도 투자자들은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공포로 암호화폐 시장으로 복귀하기를 꺼리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월가에서는 주식시장까지 파급효과가 번질 것으로 보고 있다. 찰스슈와브의 매니징디렉터인 랜디 프레더릭은 “이날 증시 하락은 중간선거가 아닌 FTX 이슈 때문”이라며 “암호화폐 시장의 문제는 그들이 정확한 자료를 내야 할 규제가 없어 모든 것이 추측과 예측의 영역이라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시장에서는 암호화폐 투자자들이 나스닥과 기술주에 동시에 투자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암호화폐 시장의 요동이 나스닥 시장에서 연쇄반응을 일으킬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이날 뉴욕 증시의 나스닥지수는 전날 종가 대비 2.4% 넘게 하락했다.
다만 전문가들과 금융 당국은 이번 사태가 국내 금융시장으로까지 번질 가능성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암호화폐를 하나의 금융시장으로 봤을 때는 ‘리먼브러더스 사태’와 유사하다”면서도 “다만 전통 금융시장으로까지의 연쇄효과는 크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이날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글로벌 금융시장 리스크 점검 및 금융회사 해외 진출을 위한 간담회’ 직후 기자들과 만나 “(FTX 유동성 위기의 국내 금융시장 전이 가능성에 대해서는) 관련 팀에 점검을 요청해둔 상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