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이] 펑크락이 흐르고 소년은 성장한다…앤 해서웨이X안소니 홉킨스 '아마겟돈 타임'

칸 경쟁부문 이어 美 아카데미 주요 부문 후보 거론
제임스 그레이의 자화상, 23일 개봉작 ‘아마겟돈 타임’


오늘 영화는 이거! '오영이'


영화 '아마겟돈 타임' 스틸

‘아마겟돈’은 지구 종말, 최종적인 재난을 뜻한다. 12세 소년의 혼란이 ‘아마겟돈’에 버금가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감독이 밝힌 바에 따르면 다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1979년 ‘더 클래시(The Clash)’가 리메이크한 ‘아마겟돈 타임’이란 곡에서 따온 것이기도, 핵 전쟁의 위협이 도사리던 1980년대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했던 연설의 일부이기도 하다. 미국 보수주의 상징과도 같은 레이건은 당시 “우리 세대는 세상의 종말을 목도할지도 모르겠다(We may be the generation that sees Armageddon)”라며 ‘아마겟돈’이란 단어를 써서 전쟁의 위협을 강조했다. 이를 제목에 빗댄 영화는 1980년대를 지배한 분위기를 다루는 시대극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영화 ‘아마겟돈 타임’은 ‘투 러버스’, ‘이민자들’을 연출한 미국 감독 제임스 그레이의 자전적인 성장 영화다. 1980년 가을, 뉴욕 퀸즈를 배경으로 어린 소년 폴이 목도한 미국 사회의 불평등과 가족에 대한 기억을 되짚는다. 제75회 칸 영화제 경쟁부문을 시작으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등 유수 영화제에 초청됐다. 내년 3월 열릴 제95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주요 부문 후보로도 거론된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는 정 반대의 모습으로 존재감을 보여준 앤 해서웨이와 ‘더 파더’, ‘양들의 침묵’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대배우 안소니 홉킨스의 만남이 눈길을 끈다. 그 외에도 제레미 스트롱, 뱅크스 레페타, 제일린 웹 등이 출연해 호연을 펼친다.




-짙은 씁쓸함 남기는 자동차 속 부자간의 대화


예술가를 꿈꾸는 소년 폴(뱅크스 레페타)은 공립학교에서 흑인 소년 죠니(제일린 웹)를 만나 친구가 된다. 폴은 예술가를 갈망하는 소년이지만, 가족은 성공할 수 없는 직업을 꿈꾸는 폴을 공상가로 치부한다. 폴의 꿈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것은 할아버지 애런(안소니 홉킨스)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폴과 죠니는 학교에서 대마초를 피우다 걸리고, 가족은 폴을 사립학교로 전학시킨다.


폴은 여태껏 자신이 머물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나고 혼란에 빠진다. 레이건을 찬양하는 그들은 부유한 상류층 백인들로, 특권을 부여받은 계층이었다. 이 학교를 졸업한 트럼프 가문 출신 검사가 와서 ‘열심히 했기에 성공했다’라고 자랑스럽게 연설한다. 특권을 부여받은 당사자들의 인식을 내비치며 사회의 모순을 꼬집는 장면이다. 사립학교 학생들은 학교에 찾아온 죠니에게 차별적인 발언을 하지만, 폴은 그런 친구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뒤늦게 폴이 할아버지 애런에게 털어놓자 그럴 땐 잘못됐다고 이야기하라며 반드시 마주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가족을 지탱하던 할아버지 애런이 세상을 떠나자, 폴의 가족은 위기를 맞는다. 폴이 차별과 모순을 인식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영화는 하이라이트로 치닫는다. 특히 일련의 사건을 겪은 뒤 자동차에서 아버지와 폴이 나누는 대화는 짙은 씁쓸함과 동시에 윤리적, 도덕적 딜레마를 남긴다.



-그 시절 감독의 성찰과 고백, 영화를 더 특별하게 만드는 음악과 리듬


영화 속 인물들은 납작하게 그려지지 않으며 다양한 결을 품고 있다. 할아버지 애런은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으로 미국 사회에서 차별받아온 기억이 있기에 폴의 꿈을 응원하면서도 그를 사립학교에 진학시킨다. 아버지 어빙은 “나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이 돼야지”라고 할 만큼 부성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정폭력을 행하는 가장이다. 폴의 가족은 뉴욕 퀸즈 시내의 고급 타운을 지나면서 자신들에게도 때가 올 것이라며 아메리칸드림을 꿈꾼다. 이민자인 이들은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면서도 자녀 둘을 모두 사립학교에 진학시키며 뒷바라지에 힘쓴다. 폴은 유대인이라는 차별을 받는 피해자인 동시에 죠니에 비하면 훌륭한 사립학교에 다니는 백인이라는 위치에 있다. 영화는 소년이 이를 인식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렇기에 영화의 진정성은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영화는 유대인 이민자 중산층 가정의 백인 소년으로서 감독의 성찰적인 고백에 가깝다. 물론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인종 차별, 계급, 가족 등 문제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관객들도 공감할 여전한 화두다. 영화 속 인물들은 단지 악인이냐 선인이냐,라는 이분법적인 선택지가 아니라 여러 모순들 속에서 살아가는 실제 사람들을 닮았다. 감독은 자신의 유년을 날카롭게 돌아보며 관객을 향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고 묻는다.


또 한 가지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고전적이면서도 따스한 영상미다. “추함과 아름다움을 동등하게 담아내고 싶었다”라는 감독의 말처럼 1980년 뉴욕 퀸즈의 우울하면서도 추억이 깃든 정서를 잘 담아냈다. 실제로 감독이 유년 시절을 보낸 집에서 27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촬영되었다. 내부는 어린 시절의 집과 초록색 카펫, 소파, 접시, 흔들의자, 벽에 붙어진 스티커까지 똑같이 만들었다고 한다.




무하마드 알리, 슈거힐 갱, 비틀스 등 당시 아이콘들도 영화 곳곳에 등장하며 문화적인 분위기가 잘 녹아져있다. 영국 밴드 더 클래시가 리메이크한 노래 ‘아마겟돈 타임’은 영화의 사운드트랙으로도 사용됐는데, 경쾌한 멜로디와는 달리 ‘오늘 밤 많은 사람들이 배를 굶겠다, 많은 사람들이 정의를 얻지 못하겠다’라는 가사가 흐르며 그 시대의 불안감을 응축해 영화에 얹는다. 그 시절의 질감을 담담히 그려낸 영화를 보다 보면 폴의 마음 한구석에 깊숙히 가닿게 된다. 오는 23일 개봉.


+요약

제목 : 아마겟돈 타임


원제 : Armageddon Time


감독/각본 : 제임스 그레이


출연 : 앤 해서웨이, 제레미 스트롱, 뱅크스 레페타, 제일린 웹, 안소니 홉킨스


장르 : 성장 드라마, 시대극


상영시간 : 114분


관람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개봉 : 2022년 11월 23일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