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글로벌 투자 업계에서 한국의 위상은 높아지는 듯 보였다.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칼라일 그룹 등 글로벌 사모펀드(PEF)의 대표 자리에 한국인이 올랐을 때가 정점이었다. 글로벌 최고경영자(CEO)가 한국인이고 아시아 투자를 총괄하는 홍콩 사무소의 대표를 한국인이 차지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때마침 서울사무소를 열고, 사람을 늘리는 등 한국 투자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최근 전 세계를 불문하고 돈줄이 마르면서 한국에 대한 투자 관심도 급격하게 시드는 분위기다. 특히 막연히 글로벌 투자 업계의 요직을 꿰찼다는 판단도 섣부른 것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전 세계는 물론 아시아에서도 중국이나 인도에 여전히 밀리는 분위기를 다시 체감하게 된 셈이다.
시작은 8월 이규성 전 칼라일 CEO가 창업자들과 갈등 속에 돌연 사임하면서다. 당시 칼라일은 현대차그룹 계열사인 글로비스의 3대 주주였다. 현대차그룹은 칼라일을 통해 글로벌 투자 업계와 연을 맺으려고 했지만 이 전 대표가 예고 없이 물러나면서 차질을 빚게 됐다.
하반기부터는 각종 대형 인수합병(M&A) 거래에서 글로벌 PEF들이 한국 기업을 포기하는 사태가 속출했다. KKR과 칼라일그룹이 인수를 추진했던 3차원 구강 스캐너 기업 메디트는 뒤늦게 뛰어든 국내 PEF MBK파트너스가 우선협상 대상자가 됐다. 국내 폴리이미드(PI) 필름 생산 기업 PI첨단소재를 인수하기 위해 주식 매매계약까지 체결했던 베어링PEA는 돌연 파기를 선언했다. 이들 기업의 구성원과 거래 기업들은 번복되는 매각 과정 때문에 불안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최고의 투자 전문가들인 글로벌 PEF가 유동성이 축소되고 기업들의 몸값이 하락하는 시점에 투자에 신중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투자를 거두는 우선순위에 한국이 먼저 들어가는 분위기인 점이 문제다. 글로벌 PEF와 거래했던 한 관계자는 “글로벌 PEF에서 서울사무소 대표의 위상이란 대기업의 부장과 비슷하다”고 촌평했다. 즉 대기업과 같이 관료적인 PEF 조직 속에서 한국은 부장 정도로 권한이 작다는 뜻이다.
아시아 투자 핵심 거점인 홍콩에서는 알려진 것과 달리 실제 투자를 결정하는 주요 인물은 여전히 중국인이나 중국과 가까운 미국인이라고 한다. 소수의 한국인이 우리로 치면 전무급인 매니징디렉터를 맡고 있지만 이들이 가져가는 한국 기업 투자 안건은 중국인들로부터 줄줄이 퇴짜를 맞았다.
결국 한국에 대한 이해와 관심, 핵심 인력이 한국인인지 여부가 마지막 투자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현실이 반영된 것이다. 최근 블랙스톤·아폴로·타이거글로벌 등 외신에서 보던 글로벌 PEF의 한국 진출 소식이 이어진다. 하지만 이들은 한국 기업 투자보다 한국의 기관투자가로부터 출자를 받으려는 목적이 더 크다.
투자에 국경은 없지만 밀물처럼 들어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글로벌 PEF 때문에 한국의 기업과 투자 업계가 흔들리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열정보다는 냉정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