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10일까지 우리나라가 기록한 반도체 수출액은 26억 3300만 달러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7.6%나 감소한 수치다. 반도체 수출은 지난달까지 4개월 연속 감소했다. 감소 폭은 9월 -4.9%, 10월 -16.4%, 11월 -28.5%로 점차 커지고 있다.
반도체 분야는 우리나라 수출의 20%가량을 책임지는 수출 품목이다. 반도체 수출액이 급락하면서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도 큰 타격을 받았다. 이달 1일부터 열흘 동안 전체 수출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8% 감소한 154억 21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실제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는 올 하반기부터 녹록지 않은 경영 환경을 견뎌내고 있다. 우선 고객사에 생산된 반도체를 팔지 못하면서 재고가 크게 늘어나는 분위기다. 삼성전자의 3분기 별도 재무제표에 따르면 회사의 해당 분기 재고자산은 25조 6810억 원으로 전년 동기(13조 5000억 원)보다 90.23%나 급등했다. SK하이닉스 재고는 지난해 3분기 5조 2338억 원에서 올 3분기 8조 9890억 원으로 71.75%나 상승했다. 업계에 따르면 현재 SK하이닉스의 재고 일수만 40주 수준으로 위험 수위에 다다랐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10월 열린 3분기 실적설명회에서 “이번 분기 재고 증가는 주로 메모리 사업을 운영하면서 발생했다”며 “거시 경제 이슈 영향으로 수요가 위축됐고 메모리 재고가 증가한 것은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더군다나 수요 침체로 반도체 가격까지 대폭 내리며 판매 중인 제품의 수익성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다. PC용 범용 제품으로 쓰이는 DDR4 8기가비트(Gb) D램의 지난달 평균 고정 거래 가격은 2.21달러로 올해 형성된 가격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USB용 128Gb 낸드플래시의 경우에도 평균 11월 고정 거래 가격이 4.14달러로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경영 환경이 악화일로를 걷자 반도체 업체들은 내년 생산 능력 예산을 보수적으로 책정하거나 대폭 삭감에 나섰다. 특히 SK하이닉스는 내년 설비 투자액을 큰 폭으로 줄일 것으로 보인다. 대만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는 11월 보고서를 통해 내년 SK하이닉스가 D램 설비 투자에 35억 달러를 쓸 것으로 분석했다. 올해 회사의 설비투자 전망치(67억 5800만 달러)보다 48.21% 감소한 수치다. 또 회사의 낸드플래시 설비투자 예산 전망치는 26억 달러로 올해 투자액보다 41.57% 깎일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 노종원 SK하이닉스 사장은 10월 3분기 실적설명회에서 “10조 원대 후반으로 예상되는 올해 투자액 대비 내년 투자 규모를 50%를 조금 상회하는 수준으로 줄이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나마 D램·낸드플래시 업계 1위로 130조 원 가까운 풍부한 현금성 자산을 보유한 삼성전자는 올해와 비슷하거나 약간 낮은 수준의 메모리 설비투자를 집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평택 3라인을 중심으로 낸드플래시보다는 D램 투자에 집중할 것으로 관측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불황에 대비해 긴축에 나서는 상황에서도 미국에 거점을 마련 중인 인텔, 대만의 TSMC 등 반도체 라이벌 회사들은 공격 경영의 끈을 놓지 않는 모습이다. 대만 TSMC는 6일(현지 시간) 열린 미국 애리조나 공장 반도체 장비 반입식에서 설비투자 금액을 당초 120억 달러의 3배 이상인 400억 달러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미국 반도체 ‘선봉’ 인텔 역시 적극적인 설비투자를 이어가는 분위기다. 최근 인텔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보기술(IT) 시장 수요 악화에도 반도체 생산 주도권을 쥐기 위한 투자는 줄이지 않겠다는 방침을 분명하게 전했다.
업계에서는 이들이 미국에서 공격적인 투자에 나설 수 있는 것은 미국 정부의 반도체 공급망 재건을 위한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실제 TSMC의 장비 반입식에는 8월 반도체과학법(CHIPS Act)에 서명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 젠슨 황 엔비디아 CEO, 리사 수 AMD CEO 등 기라성 같은 현지 칩 업계 고위 관계자가 참석해 TSMC의 투자에 힘을 실었다.
다만 한국 정부는 높은 규제 장벽과 세율로 국내 기업들의 불황 타개와 경쟁력 확보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반도체 시설 투자 기업의 세액공제율을 최대 30%까지 늘리는 것이 골자인 반도체특별법(K칩스법)은 8월 국회 발의 이후 여야 정쟁으로 4개월째 지지부진하다. 유환익 전국경제인연합회 산업 본부장은 “세계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 중인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주요국에 비해 큰 세 부담을 지고 있는데 이 효과가 누적되면 뒤처질 수밖에 없다”며 “우리나라도 시설투자 세액공제율을 미국처럼 25%로 높이는 등 공세적인 정책을 펼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