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오후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장비 업체인 에스에프에이(056190)가 2차전지 장비업체 씨아이에스(222080)를 전격 인수했다고 공시했습니다. 에스에프에이는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의 주요 협력업체로 반도체 생산의 후기 공정에 속하는 조립과 테스트 장비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올해 상반기 에스에프에이의 자회사를 매각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반대로 에스에프에이가 2차전지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또다른 매물인 씨아이에스를 인수한 것입니다.
에스에프에이는 지금은 한화로 넘어간 삼성테크원 물류사업부에서 출발해 독립한 지금도 삼성전자와 안정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한 기업입니다. 지난해 매출 1조 6000억 원 대를 달성하며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장비 업계에서는 상위권에 속한 중견 기업입니다.
에스에프에이의 최대주주인 원진 부회장은 동양엘리베이터 창업자인 원종목 전 회장의 차남입니다. 그는 수년전에는 에스에프에이 매각을 검토했고, 올해 상반기에는 자회사인 에스에프에이 반도체를 팔기 위해 의향을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안정적인 반도체 장비기업에 대해 국내외 대형 사모펀드(PEF)가 깊은 관심을 보였죠. 그러나 이미 시장의 유동성이 줄어들면서 매도자와 인수 후보간 가격에 대한 차이는 컸고, 구체적인 매각 절차를 진행하지 않은 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투자의 귀재로 알려진 원 부회장은 매각을 접고 아예 새로운 먹거리를 키우기로 마음먹은 듯 합니다. 에스에프에이는 기존 반도체 장비 외에 2차전지 공정의 일부인 조립화 과정에도 장비를 제공하고 있는데요. 보다 수익성이 크고 진입장벽이 높은 전극 공정에 진출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 대상은 바로 이미 사모펀드 SBI인베스트먼트가 인수해 매물로 내놓은 씨아이에스입니다.
에스에프에이가 씨아이에스를 눈여겨 본 배경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있습니다. 흔히 2차전지는 전기차 수혜 업종으로 여기는데요. 현재는 그렇지만, 이미 주요 2차전지 업체들은 앞으로 더 많은 수요가 에너지저장장치(ESS)에서 나올 것으로 봅니다. 기술적 장벽은 전기차용 2차전지가 높지만, 수요량 자체는 ESS가 더 많을 것으로 예상하기도 합니다.
근본적으로 친환경 에너지 수요가 늘어나면서 태양광이나 풍력발전 에너지 저장 수요가 높아진 게 우선이겠고요. 우크라이나 전쟁도 유럽의 에너지 수요를 부추긴 격이 됐습니다. 그 동안 2차전지 제조는 2차전지를 처음 양산한 일본을 시작으로 한국·중국 등 아시아 기업들이 주축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영국과 스웨덴 등 유럽 국가도 직접 2차전지 제조사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각국 정부 차원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영국의 브리티시볼트가 그 중 하나인데요. 이들은 전체 공정 장비를 한꺼번에 설계하고 만들어주는 턴키 공정을 선호합니다. 씨아이에스는 바로 전극 공정 장비를 브리티시볼트에 턴키 공정 방식으로 납품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2차전지 공정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2차전지는 크게 전극-조립-활성화 공정을 거쳐 제조합니다. 전극은 양극과 음극극판을 만드는 과정이고, 여기에 전해액을 넣어 파우치에 담는 조립화를 거칩니다. 이후 전지를 충전해 전기적인 특성을 부여하는 활성화를 통해 2차 전지로 태어나게 됩니다. 에스에프에이의 2차전지 사업은 주로 조립 과정 일부를 담당하고 있고, 씨아이에스는 전극 공정 중 주요 3가지 단계인 압연·절단·코팅을 맡고 있습니다. 전극 공정은 상대적으로 기술력을 갖추고 국내외 대형 배터리 업체에 납품하는 기업이 씨아이에스이외에는 피엔티가 있습니다. 에스에프에이는 이번에 씨아이에스를 인수하면서 피엔티와도 경쟁에 나서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씨아이에스는 매각을 시도한 이후 많은 관심을 받긴 했지만, 주로 기업들이 인수 검토에 나서면서 실제 매각은 다소 지지부진한 상태가 이어졌습니다. 금리인상과 유동성 축소로 기업들이 있는 지갑도 닫는 형편이었기 때문이죠. 투자설명서를 받아간 40여 곳 가운데는 LX그룹 등 대기업과 중견 기업이 많았지만, 막판까지도 확실한 인수 의지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에스에프에이는 매각 중반 뛰어든 것으로 파악 됩니다. 당장 동원할 수 있는 현금성 자산만 4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씨아이에스 경영권 지분 28%를 1800억 원에 인수 하는데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최근에 많은 알짜 기업 매각이 막판에 무산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이번 매각 역시 금요일에 공시하기 이틀 전까지도 무산될 뻔 했다고 하네요. 씨아이에스 매각에 나선 SBI 등은 상장사인 씨아이에스의 주가보다 싼 매각가를 받아들였습니다. 씨아이에스는 중견 사모펀드인 SBI인베스트먼트와 에스티리더스가 2020년 보통주와 전환사채(CB) 등 총 830억 원을 들여 인수했는데요. 이들의 뒤에는 새마을금고중앙회와 KDB산업은행 등이 주요 출자자였습니다. 현 주가보다 싸게 팔았다지만 이들은 투자 당시 주당 6000원에 샀기 때문에 이번에 투자금의 1.8배를 회수하게 됩니다. 이번 매각가 주당 1만 800원으로 현 주가(주당 1만 1650원)보다는 낮지만 2년 전 투자 단가에 비하면 무척 성공적인 투자라 할 수 있겠죠. 투자 성공에 고무된 산업은행은 내년에도 이 같은 프로젝트 투자를 늘릴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시장이 어렵다고 해도 답을 찾는 기업과 투자자는 나오기 마련입니다. 내년에도 시장을 헤치는 기업과 투자자가 나올 수 있을지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