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발전을 포기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독일이 좋은 교훈이 됐습니다. 독일이 예전처럼 원전에서 25%의 전력을 얻고 있었다면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 위기에 훨씬 덜 취약했을 것입니다.”
대니얼 예긴 S&P글로벌 부회장이 지난해 12월 26일(현지 시간) 서울경제와의 신년 특별 인터뷰에서 올해 에너지 위기가 더욱 고조될 것으로 예측하며 원전을 포함한 에너지 공급망 다변화가 ‘에너지 안보’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이미 전 세계에서 “첨단 원자로와 차세대 원전을 포함해 원전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일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예긴 부회장은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에너지 및 지정학 분야의 권위자로 석유를 둘러싼 부와 권력의 탄생, 국제 갈등을 다룬 저서 ‘황금의 샘(The Prize)’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20년 발간된 저서 ‘뉴맵(New Map)’에서는 탄소 중립을 향한 글로벌 도전과 미중러 간 에너지 패권 전쟁을 다뤄 깊이 있는 통찰력을 보여줬다. 빌 클린턴부터 도널드 트럼프까지 미국의 4개 행정부에서 에너지자문위원을 맡았고 미국 내 가장 저명한 에너지컨설팅사 케임브리지에너지연구소(CERA)의 설립자이기도 한 그는 에너지 자원 빈국인 한국은 에너지 기술 개발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조언도 건넸다.
우크라 전쟁에 에너지 지형 대격변
예긴 부회장은 올해 에너지 시장의 전망을 묻는 질문에 “유럽은 다음 겨울에 결국 러시아 가스로 가스 창고를 채우지 못할 것”이라며 “이는 액화천연가스(LNG)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세계 에너지 지형 변화가 본격화한다는 뜻이다.
그는 “미국 LNG는 2021년에 주로 아시아로 수출됐으나 지금은 유럽이 가장 큰 시장이 됐다”면서 “이는 앞으로 유럽과 아시아가 천연가스 공급망을 두고 다툰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로 인해 LNG의 가격 변동성도 높아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천연가스의 99%를 수입해 쓰는 한국 역시 우크라이나 사태의 직접 영향권에 놓이게 되는 셈인데 지금의 에너지 위기는 1970년대 오일쇼크(석유파동)에 비해 훨씬 더 복잡하며 해결책을 찾기도 어렵다고 예긴 부회장은 지적했다.
그는 “1970년대는 주로 석유와 관련한 문제였으나 지금의 위기는 석유뿐 아니라 천연가스·우라늄·석탄 등이 모두 관련돼 있다”며 “위기의 성격이 다르다”고 밝혔다. 여기에 끝나지 않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러시아의 ‘핵 위협’이 여전한 점은 에너지 시장의 ‘거대한 그림자’라고 예긴 부회장은 우려했다. 그는 “지금까지의 에너지 위기들도 전쟁 및 지정학적 분쟁과 대부분 관련돼 있었으나 적어도 핵전쟁의 위협만큼은 없었다”고 부연했다.
에너지 안보 위해선 원전 필수
세계적인 에너지 위기의 와중에 예긴 부회장이 첫 번째로 꼽은 에너지 안보 원칙은 공급망 다변화다. 그는 “최근 세계 각국의 논의는 다변화의 일환으로 원전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예긴 부회장은 전쟁의 여파로 에너지 시장이 격변하는 가운데 에너지 안보를 지키기 위한 원전의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석유와 석탄·천연가스 등과 같은 천연자원의 공급망 리스크가 점점 커지는 상황에 원전 같은 안정적인 에너지원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다는 의미다. 친환경에너지 확대를 위해 세계 각국이 신재생에너지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고 있지만 풍력이나 태양광이 기존의 화석연료를 완전히 대체하기는 역부족이라는 분석이다. 그는 “풍력과 태양광의 발전은 인상적이지만 이들 에너지원이 옷이나 약이나 화장품을 주지는 않는다”면서 석유화학물질이 갖고 있는 또 다른 거대한 시장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이어 “풍력과 태양열은 현재 세계 에너지의 약 3%, 화석연료는 80%를 공급한다”며 절대 수치 측면에서 신재생에너지 전환에 장기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음을 직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예긴 부회장은 특히 천연자원이 없는 한국 같은 나라들에서 ‘에너지 기술’은 곧 에너지 안보와 직결된다고 조언했다. 그는 “한국이 강점을 가진 배터리 같은 분야에서 계속 첨단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국의 에너지 안보를 지키고 나아가 전 세계의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한국을 주체로 만들 수 있다”고 밝혔다.
전기차는 광물 전쟁 앞당길 것... 中 움직임 주시할 필요
예긴 부회장은 최근 자신의 연구팀이 ‘구리’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진행한 사실을 언급하며 전기자동차 시대를 맞아 글로벌 광물 시장의 변화를 주시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세계 각국이 전기차 시대를 앞당기기 위해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지급하고 휘발유 차에 대한 각종 규제를 도입하고 있지만 전기차 시대로 초래될 ‘리스크’ 또한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긴 부회장은 “전기차 시장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광물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고 (광물 관련) 비용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기차는 내연기관차보다 배선이 많아 구리 같은 금속을 2배 이상 사용하며 배터리 제조를 위해 리튬과 코발트 등이 필요하다. 예긴 부회장은 “이런 한계 때문에 자동차 시장에서 휘발유차의 비중이 줄어들더라도 여전히 수십 년간 상당한 규모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같은 이유로 광물 시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중국의 전기차 시장을 눈여겨봐야 한다고도 지적했다. 그는 “중국이 휘발유차로는 이룰 수 없었던 자동차 시장의 주요 패권을 전기차로 차지할 수도 있다”고 예측했다.
"'원유 물길' 남중국해는 美·中 에너지패권 전쟁터…韓 무역에도 절대적 영향"
대니얼 예긴 S&P글로벌 부회장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물길’이자 향후 미중 갈등의 ‘발화점’으로 남중국해를 지목했다. 남중국해는 중국과 동남아 국가들의 영유권 갈등 심화로 미중 간 군사적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는 곳이다.
예긴 부회장은 “남중국해는 한국에도 엄청나게 중요하다”면서 “미중이 직접 충돌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인데다 이 수로가 세계 무역은 물론 한국 교역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남중국해는 한국·중국·일본으로 수입되는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의 절반 이상이 통과해야 하는 중요한 무역 수송로다. 전 세계 원유 매장량의 10%가량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산되며 세계 어획량의 10%를 차지하는 해양자원의 보고이기도 하다.
예긴 부회장은 “중국이 이 거대한 수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이유 중 하나는 막대한 원유가 이곳을 통과한다는 것”이라면서 “중국은 이곳에서 미국과 충돌하는 것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런 만큼 “남중국해서 벌어지는 미중 간 에너지 패권 다툼을 한국 같은 주변국들이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조언이다.
그는 아울러 현재 세계 정세가 ‘강대국 경쟁(Great Power Competition)’의 시대에 본격 진입했다고 평가했다. 세계무역기구(WTO) 합의에 기반한 무역의 시대가 끝나고 미국과 중국이 각자의 힘으로 새 무역 질서를 짜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 미국에서 통과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보면 그 중 상당 부분은 배터리와 신재생 분야에서 대체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중국과의 경쟁’ 행위”라며 “중국은 중국대로 자체 공급망 구축을 강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세계 경제가 블록화하는 와중에도 중국은 한국에 여전히 매우 중요한 존재라고 예긴 부회장은 진단했다. 그는 “지난 수년간 국유화를 대폭 강화화고 민간을 통제해온 중국이 최근 경제 성장 궤도에 복귀하기 위해 민간 부문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지정학적으로) 극적인 변화가 있지 않는 한 중국은 한국과 앞으로도 매우 중요한 경제적 파트너일 수밖에 없다”고 언급했다.
He is…
△1947년 △1983년 케임브리지에너지연구소(CERA) 설립 △1992년 ‘더 프라이즈(The Prize)’로 퓰리처상 수상 △2012년 IHS 부회장(~2021년) △에너지 포럼 세라위크(CERAWeek) 의장 △외교관계위원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 이사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이사 △미국에너지협회 이사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에너지자문 위원 △2022년 S&P글로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