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초 윤석열 대통령이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제안했지만 선거법 개정을 논의할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소속 여당 의원들 절대 다수가 유보입장을 보이고 있다. 집권 여당으로 윤 대통령의 철학을 구현하는 것을 넘어 당 운영에도 있어서도 ‘윤심을 쫓기에 급급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국회의원의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하는 선거제 개편에는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이다. 오히려 야당 소속 정개특위 위원들이 윤 대통령의 정치개혁 의지를 반기고 나섰다.
서울경제신문이 4일 지금까지 법안 발의 현황과 정개특위 의원들의 개인 의견 등을 종합해 파악한 결과 현행 소선거구제 폐지 뒤 중대선거구제 도입하는 방안에 대해 국민의힘 위원 8명 중 7명은 판단을 유보했다. 유보를 택한 7명 위원은 “추가 고민이 필요하다” “지도부와 협의가 필요하다” 등 신중한 태도였고, 1명만 “승자독식 정치를 극복해야 한다”고 찬성 입장을 밝혔다.
반면 야당 위원 대다수는 현행 선거구제 폐지에 비교적 우호적인 것으로 파악됐다. 중대선거구제 도입에 동의하는 의견과 ‘연동형 권역별 비례대표제’ 등 현 제도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정교한 해법 모색을 시작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패했다. 남인순 의원은 위원장 자격으로 “의견을 밝히기 어려운 입장”이라고 답했다.
윤 대통령의 주문에도 불구하고 여당이 신중론은 유지하는 배경에는 의석을 대거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감이 큰 것으로 분석됐다. 중대선거구제 도입으로 ‘보수 텃밭’ 영남권(65석 중 56석 국민의힘)이 흔들리는 것은 불가피한데 과연 손해를 본 이상의 의석을 수도권·호남에서 확보할 수 있을지가 가장 큰 고민인 셈이다. 국민의힘의 A 위원은 “중대선거구제 도입은 조심해서 접근할 문제”라며 “영남권에는 민주당 의원들이 있지만 호남에서 국민의힘의 지지 기반이 없다. 수도권에서 (잃은 의석 만큼을) 얻을 수 있을지도 지켜볼 문제”라고 말했다.
영남권 의원들의 저항, 공천을 둘러싼 내부 갈등 심화, 지역 대표성 훼손 등 협의 과정에서 난관이 수두룩하다는 현실론도 반영됐다. 국민의힘 B 위원은 “농어촌 지역구가 통합되면 7개 이상의 시·군이 합쳐질 텐데 ‘지역 대표성’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며 “대도시는 (공천) 순번을 어떻게 정할 것인지도 민감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2024년 총선에서 중대선거구제 도입은 사실상 어렵다는 전망마저 나왔다. C 위원은 “차기 총선까지 1년 밖에 남지 않아 지금 선거구제를 흔들면 후폭풍이 엄청날 것”이라며 “22대 총선은 소선거구제로 가고 장기적으로 부분적으로 대도시에서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속도 조절을 제안했다.
여당의 이 같은 소극적인 반응은 그간의 태도와 대조된다. 국민의힘은 3대 개혁, 화물연대 파업 원칙 대응 등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운영 실현에 앞장서는 것은 물론 지도부 인사들도 윤심을 얻은 후보들을 사실상 추대하는 방식으로 선출해왔다. 정치적 구호에 그쳤던 정치 개혁 논의가 올해는 활성화될 수 있다는 기대가 흘러나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윤심 관철을 위한 여론 조성을 주도해왔던 친윤계도 이번에는 별다른 목소리 내지 않고 있다. 이들이 보수 지지세가 강한 영남·강원에 지역구를 둬 공천만 받으면 당선이 유력한 만큼 구태여 리스크를 만들지 않겠다는 판단으로 읽힌다.
반면 야당은 이례적으로 윤 대통령에 보조를 맞추고 있다. 소선거구제 폐지에 찬성한 야당의 6명 위원들은 윤 대통령 언급에 대해 “매우 고무적이다” “정개특위 논의가 활성화가 가능해졌다” 등의 반응이 나왔다.
다만 선거구제 개편 방식에 대해선 도농복합형 중대선거구, 권역별 연동형 비례대표제 등으로 의견이 갈렸다.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주장한 야당의 D 위원은 “중대선거구제가 소선거구제보다 손톱 만큼이라도 더 진일보한 제도”라며 “다만 (전국 권역에서) 중대선거구제를 실시하기는 어렵고 도농복합 중대선거구제가 현실성이 있다”고 말했다. 야당의 E 위원은 “윤 대통령이 말한 건 2~4인 선거구제다. 과연 현실 정치에서 다당제가 실현될지 의문”이라며 “중대선거구제보단 권역별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온전하게 실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주 원내대표는 여당 정개특위 위원들과 긴급 회의를 열고 선거구제 개편 논의의 첫 발을 뗐다. 주 원내대표는 회의 뒤 “가급적 중대선거구제로 옮겨갈 수 있는 방향으로 노력해보자는 정도의 이야기가 있었다”며 “소·중대선거구제의 장·단점에 관한 전문가 의견을 좀 더 들은 뒤 그것들을 토대로 다시 의견을 정리하기로 했다”고 회의 결과를 밝혔다.
주 원내대표의 의지에도 향후 험로를 전망하는 의견도 나왔다. 정개특위 여당 측 간사인 이양수 의원은 회의 뒤 “각 당끼리 의견이 부딪히는 게 아니고, 모든 의원들의 입장이 부딪히는 게 많다”며 “결론을 도출해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중대선거구제 필요성을 언급한 배경에 대해 그는 “기자분의 질문에 대해 평소 소신을 이야기하신 것”이라며 “직접 드라이브를 걸겠다고 하신 건 아니라고 알고 있다. 대통령도 국회 뜻을 존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