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한국 드라마 ‘킹덤’이 공개됐을 때 의도하지 않게 주목받은 것이 ‘갓’ 등 조선의 모자다. 드라마를 접한 외국인 시청자들은 등장인물들이 착용한 다양한 형태의 모자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킹덤 정말 끝내주는데 최고는 좀비보다 모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는 조선말 개화기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특히 당시 사람들이 쓴 모자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들이 남긴 그림과 사진, 글들이 우리 모자에 대한 중요한 역사적 기록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과거 조선은 ‘모자 왕국’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모자의 종류가 다양했고 또 독특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일반 선비의 모자로는 ‘갓’이라고 불리며 현대 우리에게도 익숙한 흑립(黑笠)을 비롯해 정자관, 동파관, 망건, 탕건, 감투, 복건, 효건, 이엄 등이 있었다.
또 왕이 쓴 모자에는 면류관, 원유관, 익선관 등이, 왕비는 적관, 주취칠적관 등이 있었다. 또 관리용으로는 사모, 양관, 제관, 복두, 전립, 첨주, 원주, 주립 등이, 중인용으로서는 유각평정건, 조건, 방립 등이 있었다. 평민들은 패랭이(평량자), 갈모 등을, 천민은 벙거지 등을 각각 사용했다.
여성용으로는 화관, 족두리, 전모, 남바위, 조바위, 아얌, 볼끼, 장옷, 쓰개치마, 처네 등이, 아동용으로는 굴레, 호건, 복건 등이 있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모자들이 각각 다른 용도로 사용됐다.
역사연구가 이승우가 최근 펴낸 ‘모자의 나라 조선’은 지금까지 잊고 있었거나 알지 못했지만 분명히 존재하며 시대를 형성해간 수많은 조선의 모자를 들여다보는 책이다. 조선 사회에서 모자는 장식품이나 장신구의 역할을 넘어선 신체와 삶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종류의 모자가 필요했을까. 저자는 머리에 상투를 트는 고유문화와 함께 신분제라는 사회적 규범을 통해 설명을 한다.
먼저 우리 조상들이 했던 상투를 살펴본다. 중국 ‘사기 조선열전’에 서기전 195년경 연나라 만(滿)이 고대 조선으로 망명할 때 상투를 했다고 기록돼 있다. “연나라 사람 만이 무리 천여인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의 요새를 벗어났는데…”라는 문장에서 최초로 우리 민족의 상투 이야기가 나온다. 고대 조선의 상투는 낮고도 단단한 모양이어서 ‘북상투’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어 나오는 역사상 수많은 기록과 그림에서도 상투가 선명하다. 이는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우리 민족이 머리를 귀하게 여기는 ‘존두사상’이 있었고 여기서 머리를 보호하고 장식하는 모자의 중요성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집안으로 들어갈 때 신발과 겉옷은 벗어도 모자를 그대로 쓰고 있었던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이와 함께 오랫동안 강고하게 이어져 온 신분제도도 모자의 확산에 역할을 했다. 조선사회에서 신분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옷만큼 모자도 중요했다. 양반과 중인, 평민, 노비들은 각자의 신분에 맞는 모자가 있었고 때와 장소에 따라 써야 할 모자가 구별됐다.
저자는 ‘갓’에 대해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설명을 한다. 갓은 실처럼 가늘게 자른 대나무와 말총(말의 갈기나 꼬리털)을 이용해 만들었다. 수작업만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제대로 된 갓을 만들려면 이들 ‘갓장이’들이 10년 이상의 숙련 기간을 거쳐야 했다고 한다. 갓은 ‘원과 직선의 만남’이고 당대 ‘수공예의 결정체’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조선의 모자는 1900년대 초 갑작스럽게 종말을 고한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정책 때문이다. 일본은 우리의 문화와 사상, 말과 글 등과 함께 복식에까지 ‘문화적 제노사이드’를 저질렀다. 밝고 경쾌했던 조선의 모자를 대신해 일본은 군국주의에 기반한 검은색 일변도의 ‘학도모자’를 들고 왔다.
단발령 조치 이후 사람들이 상투를 틀지 않으면서 기존 모자들의 활용성을 잃어버린 것도 이들의 소멸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2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