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인구 14억 명의 거대 시장 ‘인도 비전’을 꿈꿨지만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문재인 정부 기간 한·인도는 매년 2건의 신규 공동 연구를 추진하기로 했으나 최근 3년간 고작 반타작에 불과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드러났다. 문재인 정부에 앞서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도 인도와의 공동 연구를 추진했지만 정권 교체와 4강 중심 외교 등으로 연속성 있는 정책 추진에는 실패했다.
외교가에서는 윤석열 정부가 미래 패권국인 인도와의 우호 관계를 일찌감치 구축해 미중 패권 경쟁 속 탈(脫)중국에 드라이브를 거는 한편 국내 기업의 활동 반경을 넓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文 신남방·印 동방정책’ 접점 꾀했지만…성적표는 기대 이하=9일 서울경제 취재를 종합하면 문재인 정부는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3년 동안 인도 정부와 총 6건의 공동 연구 착수를 목표로 삼았지만 이달 기준 3건의 과제밖에 시작하지 못했다.
한국과 인도는 2018년 7월 문재인 전 대통령의 인도 국빈 방문을 계기로 ‘한·인도 미래비전전략그룹 설립’ 양해각서(MOU)에 서명했다. 이에 대한 후속 조치로 양국은 2020년부터 한국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인도 과학기술부를 중심으로 매년 5억 원의 예산을 각각 편성, 공동 연구개발(R&D) 사업을 진행해왔다. 양국이 매년 디지털 전환 및 바이오헬스 분야 주제 연구를 각 1건씩 공동으로 시작해 2년간 연구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해당 사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됐다면 양국은 지난해까지 총 4건의 연구를 마무리하고 현재 2건의 과제를 추가로 진행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올해 1월 기준 양국은 2020년 시작한 2건의 연구만 마쳤고 지난해 시작한 1건의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마지막 해인 2021년에도 신규 과제 2건에 착수해야 했으나 인도 정부가 관련 예산을 편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한 건의 연구도 시작하지 못한 탓이다. 인도 측은 지난해에도 신규 과제 2건에 착수하는 대신 당초 2021년 착수했어야 하는 과제 1건만 시작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관가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신남방정책과 인도 정부의 ‘액트 이스트(Act East·행동하는 동방정책)’ 간 접점을 추구했지만 인도 정부의 비협조로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인도의 정치 지형도 우리와는 다르다. 인도 인구는 세계 1위지만 중국처럼 국가 제도가 약하고 일사분란한 측면은 없다. 중앙정부가 추진을 해도 지방정부에서의 실행은 늦어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정상회담을 통하더라도 주고받을 수 있는 게 많지 않은 이유다. 우리 기업들도 이런 탓에 적극적인 진출을 꺼리기도 한다. 한 기업체 관계자는 “중앙집권적이지 않아서 지방마다 호떡 뒤집듯이 제도를 바꾸기도 해 기업하기 쉬운 환경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에다 인도는 제조업 자체의 기반이 허약하다. 원재료 등은 대부분 중국이 장악하고 있는 탓에 적대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인도의 최대 교역국 중 하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도 지지부진…尹정부, 印과 '준동맹 관계' 꾀해야=이명박·박근혜 정부도 인도와 ‘과학기술공동위원회’를 설치해 공동 연구를 추진했지만 연속성 있는 정책을 펼치지 못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임기 3년 차인 2010년 1월에야 만모한 싱 당시 인도 총리와의 정상회담 이후 차관급이던 양국 과학기술공동위원회를 장관급으로 격상하고 2011년 5월 서울, 2012년 12월 델리에서 1·2차 회의를 개최했다. 박근혜 정부도 마찬가지로 임기 중반부에 접어든 2015년 11월 서울에서 3차 회의를 개최했고 2017년 중 4차 회의를 열기로 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로 회의 개최 자체가 무산됐다.
정부 안팎에서는 윤석열 정부가 임기 초부터 인도와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해 경제적·외교적 실익을 모두 꾀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미중 갈등으로 흔들리는 한국에 인도는 전 세계 1위의 인구 대국이자 경제 규모 3위를 넘보는,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진 국가라는 점에서다. 윤석열 정부가 최근 발표한 독자 인도태평양 전략을 통해 인도와의 결속으로 중국 및 권위주의 체제 모두를 견제할 여지를 충분히 확보했다는 분석도 뒤따른다.
외교부 1·2차관을 모두 지낸 신각수 전 주일한국대사는 “중장기적인 대(對)인도 정책이 필요하다”며 “전체적인 세계 질서 흐름 속에 우리도 같이 가야 한다. 정부가 아시아태평양 전략에서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방향을 튼 것도 인도에 비중을 크게 둔 것”이라고 했다. 정부 내에서도 “인도는 경제적 측면에서 놓칠 수 없는 시장”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정부로서는 인도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최대한 유지하고 기업들은 현지에서 관(官)을 뚫고 인력을 교육시키고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도전해야 할 시장”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