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해방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이육사 선생의 정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15일 오전 중국 수도 베이징의 한 골목 허름한 건물 앞에 조촐하지만 뜻깊은 제사상이 마련됐다. 베이징 교민들로 구성된 ‘재중항일역사기념사업회’가 이육사가 순국한 것으로 추정되는 둥청구 둥창후퉁 28호를 찾아가 추모 행사를 개최한 것이다. 북어포와 과일에 소주 몇 잔이 전부였지만 교민들은 영하 10도의 추운 날씨에도 숙연한 표정으로 79년 전 숨진 민족 시인의 넋을 기렸다.
베이징의 명동으로 불리는 왕푸징 지하철역에서 1.5㎞ 떨어진 둥창후퉁 28호는 일본 헌병대가 지하 감옥으로 사용한 곳이다. 이육사는 국내 무기 반입 등을 이유로 1943년 가을 경성에서 체포된 뒤 베이징으로 압송돼 이듬해 1월 16일 새벽 고문 끝에 숨졌다. 둥창후퉁 28호는 그가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에는 일제가 패망 직전까지 사용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2층 건물이 남아 있다. 지하 감옥으로 사용된 공간은 물론 오래된 쇠창살 등도 그대로지만 지금도 주민이 살고 있다.
기념사업회는 매년 이맘때가 되면 추모 행사를 통해 시인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올해는 현지 주민들이 건물 재건축과 함께 외부인의 출입을 막으면서 내부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골목에서 간단한 묵념을 하며 추모 행사를 마쳤다. 신용섭 기념사업회장은 “매년 추모 행사를 할 때마다 주변 건물이 바뀌었는데 올해는 재건축으로 출입조차 하지 못했다”며 “역사의 흔적이 사라지기 전에 제대로 된 평가 작업이 진행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90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이육사는 1925년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다. 본명은 이원록으로 1927년 독립운동가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는데 당시 수인 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고 한다. 출옥 후 베이징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뒤 수학 도중 중국 문학가 겸 사상가인 루쉰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3년 귀국해 육사라는 이름으로 시 ‘황혼’을 발표해 등단했다.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논문·시나리오를 썼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1937년에는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 유명한 ‘청포도’를 비롯해 ‘교목’ ‘절정’ ‘광야’ 등을 발표했다. 그는 시작 활동 못지않게 독립 투쟁에 헌신해 전 생애를 통해 17회나 투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