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영웅' 나문희, 관록은 빛난다

'영웅' 나문희 / 사진=CJENM 제공

영화 '영웅'에서 배우 나문희의 관록은 빛났다. 아들에게 죽음을 말하는, 결의에 찬 어머니의 마음이 관객들에게 슬픈 공감으로 남은 것이다. 특히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넘버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는 눈물을 쏟게 만들기 충분했다.


'영웅'(감독 윤제균)은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김승락)를 사살한 뒤 일본 법정의 사형 판결을 받고 순국한 안중근(정성화) 의사가 거사를 준비하던 때부터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까지, 잊을 수 없는 마지막 1년을 그린다. 나문희가 연기한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의 어머니로, 안중근이 굳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돕는다.


나문희가 '영웅'에 출연한 계기는 윤제균 감독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윤 감독이 제작을 맡은 영화 '하모니'에 출연한 나문희는 당시 좋은 기억을 갖고 있었다. 편안한 촬영장에서 마지막 신까지 아름답게 마무리했던 나문희는 '영웅' 제의를 받았을 때 "나를 믿는 데가 있으시구나"라는 마음이 들었고, 주저 없이 작품을 선택하게 됐다.


선뜻 '영웅' 출연을 결정했지만, 작품은 다소 무거운 역사적 사건과 실존 인물을 다루고 있었다.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에게 "주저 말고 죽으라"고 말할 정도로 강단 있는 인물. 나문희는 실감이 나지 않는, 깊은 감정 앞에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엄마에게 자식이란 10살이든 30살이든 50살이든 우선인 존재예요. 그런데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에게 대한민국 의병대장으로서 일본군과 끝까지 맞서 싸우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라고 하잖아요. 그것도 그냥 바치는 게 아니라 사형 집행이에요. 정말 기가 막힌 심정이죠. 나라를 위해서 자식을 바친다는 게 말이 쉽지, 어렵잖아요. 알 수 없는 감정이지만, 제가 갖고 있는 연기로 끝까지 해보자는 마음으로 임했죠."



'영웅' 스틸 / 사진=CJENM

"조마리아 여사는 어머니의 시선과는 조금 다른 것 같더라고요. 아무래도 시대상이 있으니까 그렇겠죠. 실천하기 어려운 일 앞에서, 조마리아 여사와 안중근은 결단하잖아요. 생각을 하다 보니 '조마리아 여사가 그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았을까?'까지 오더라고요. 조마리아 여사 같은 어머니니까, 안중근이라는 아들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만약 저라면 그런 아들이 싫을 것 같아요."(웃음)


오리지널 뮤지컬의 영화화는 대한민국에 없던 것이었다. 나문희는 '뮤지컬 영화가 성공할 수 있을까?', '내가 뮤지컬로 조마리아 여사를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털어버리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된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 묵묵히 캐릭터에 집중하고, 노래 레슨을 받으면서 작품을 준비했다. 음악을 전공한 딸이 있었기에 큰 도움이 됐다고.


"우리 연기자는 그냥 시키면 하는 거예요. 다행히 제가 음악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죠. 예전에 문화방송 1기생으로 들어갔는데,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메트로 뮤지컬에서 DJ를 했어요. 그때 음악 공부 참 많이 했죠. 이후 자녀들이 모두 음악을 전공해서 레슨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렇게 음악을 놓지 않을 수 있었어요."




나문희의 노력 덕에 조마리아 여사의 솔로 넘버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는 '영웅'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조마리아 여사가 안중근에게 죽으라는 편지를 쓴 후, 아들의 배냇저고리를 보며 부르는 넘버다. 아들의 수의를 한 땀 한 땀 짓는 고통,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아들을 품에 안고 싶다는 어머니의 심정이 담겨 있다. 진한 감정이 들어간 나문희의 노래에 관객들은 눈물을 쏟으며 공감한다.


"음을 생각하지 않고 가사와 감정 위주로 연기했습니다. 처음에는 형무소 담장 아래서 촬영했는데, 배냇저고리를 보면서 부르는 걸로 바뀌었죠. 데뷔 이래 테이크도 정말 많이 갔는데, 재촬영까지 했어요. 게다가 노래까지 라이브로 불러야 됐죠. 나이가 있는 저로서는 어려운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나오고 보니까 보람이 있더라고요. 제 딸들도 그 신을 보고 펑펑 울었다고 해요."(웃음)


어느덧 데뷔 62년 차를 맞은 나문희. 오랜 세월 배우의 길을 걸으며 깨달은 점은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이었다. 평소의 삶이 결국 캐릭터에 묻어나고, 배우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그는 "나를 통해서 그 인물이 창조되는 거니까, 하나를 하더라도 바르게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나문희의 배우 생활에 터닝 포인트가 된 건 영화 '아이 캔 스피크'였다. 그는 '아이 캔 스피크'로 제38회 청룡영화상, 제55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는 상을 받기까지 배우로 열등감이 있었고, 누군가와 항상 경쟁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후 여한이 없어졌다고 털어놨다.


"이제는 자유럽롭고, 누군가와 경쟁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제가 더 잘나진 것 같죠. 배우로서도 이만하면 다 이룬 게 아닐까요? 이제는 호흡이 맞는 사람을 만나서 제가 좋아하는 연기를 하는 게 그냥 행복할 뿐이에요. 다시 태어나면 배우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만족합니다."


83세의 나문희는 여러 분야에 도전하고 있다. 예능프로그램 '진격의 할매'에 출연해 입담을 뽐내는가 하면, 틱톡에서 각종 패러디 영상을 찍으며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새로운 것에 두려움은 있지만, 앞에 닥친 건 겁 없이 해보는 게 삶의 지향점이다.


"회사에서 틱톡을 해보는 게 어떻냐고 제안하더라고요. 조금 망설였는데, 매니저가 설득했죠. 해보니 매일 움직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안 움직이고 있으면 끙끙 앓는데, 생활이 되니까요. 젊은 사람 감각도 많이 익힐 수 있었어요. 틱톡을 하고 나오는 날은 굉장히 유쾌해요."(웃음)


"저는 자연스럽게 살고 싶어요. 버스 타고 가고 싶을 때 가고, 시장 가고 싶을 때 가는 삶이요.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게 좋잖아요. 이런 현실감이 연기할 때 저절로 나오니 더 좋아요. 내가 해본 일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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