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전기차 업체 테슬라의 가격 인하 공세가 완성차 업계를 넘어 K배터리까지 위협하고 있다. 전기차 제조 원가의 약 40%를 차지하는 배터리 단가가 내려갈 가능성이 커지면서다. 수익성 악화와 경기 침체 우려에 직면한 국내 배터리 업체들의 대규모 증설 계획에도 제동이 걸리고 있다. 최근에는 유럽 신생 배터리 업체의 파산까지 더해지며 중국 배터리의 아성이 더욱 공고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18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올해 상반기 제품 단가를 놓고 완성차 업계와 논의하고 있다. 리튬·니켈 등 원자재 등락 폭과 제품 스펙에 맞춰 배터리 가격이 결정된다. 톤당 60만 위안(약 1억 원)까지 치솟던 리튬 가격은 지난해 11월부터 하락을 이어오다 최근 45만 위안 수준까지 떨어졌다. 완성차 업체들은 전기차 및 원자재 가격 하락을 이유로 배터리 단가 인하를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배터리 핵심 소재인 양극재 가격은 지난해 4분기 들어 소폭 떨어졌다.
지난해 10월부터 중국에서 가격 인하에 나선 테슬라는 미국·유럽에서도 최대 20%만큼 가격을 내렸다. 판매 부진으로 재고가 쌓인 탓이라지만 일각에서는 전기차 시장을 장악한 테슬라가 후발 주자의 진입을 막기 위해 치킨게임에 나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증권가에서는 LG에너지솔루션이 테슬라로부터 오더컷(기존 발주 물량 축소)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LG엔솔은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이다.
테슬라가 쏘아올린 치킨게임에 경쟁 업체들도 뛰어들기 시작했다. 중국 샤오펑은 전날 최대 12.5%까지 가격을 인하한다고 밝혔다. 중국에서는 올해부터 전기차 보조금이 폐지되고 중국 경기가 회복세에 접어들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연초부터 가격을 조정하며 고객 유치에 나서는 형국이다. 현대차(005380)그룹 역시 가격 전략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북미산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인플레이션방지법(IRA) 여파로 미국 시장에서 입지가 좁아질 수 있어서다. 업계에서는 현대차그룹이 미국에서 가격 인하에 즉시 뛰어들기보다는 딜러에 지급하는 인센티브를 확대하는 방식을 택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와중에 세계 1위 배터리 업체인 중국 CATL은 유럽에서 K배터리와의 경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CATL은 독일에서 배터리 양산을 시작한 데 이어 헝가리에도 공장을 건설하겠다고 최근 발표했다. 리튬인산철(LFP) 배터리의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해외 고객사를 늘려가는 전략이다. 시장조사 기관 SNE리서치에 따르면 CATL의 전기차 배터리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1~11월 기준 37.1%로 전년 동기 대비 4.9%포인트 상승했다.
이는 배터리 업계의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조 원 단위 자금이 들어가는 해외 대규모 증설 계획도 경기 침체 우려 속에 제동이 걸리는 실정이다. SK온은 지난해 3월 미국 포드와 튀르키예에 배터리 합작공장을 세우기로 업무협약을 체결했지만 아직까지 논의를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다. LG엔솔도 지난해 6월 1조 7000억 원 규모의 미국 애리조나주 단독 공장 투자에 대해 전면 재검토한다고 밝힌 바 있다.
냉랭해진 자금시장은 대규모 투자가 필수적인 배터리 산업에 큰 악재가 되고 있다. 실제로 영국 배터리 업체인 브리티시볼트는 마땅한 외부 투자자를 유치하지 못한 채 17일(현지 시간) 파산 보호를 신청했다. 2019년 설립된 브리티시볼트는 영국 배터리 산업의 희망으로 불리던 회사로 46억 5000만 달러(약 5조 7500억 원) 규모의 배터리 공장 설립을 추진해왔다. 업계 관계자는 “신생 업체가 수율을 정상 궤도로 끌어올리는 데는 한참 걸린다”면서 “전기차 수요가 둔화되는 상황에서 당장 수익을 내지 못하는 업체에 투자자들이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국과 배터리 시장을 양분하는 한국 업계로서는 전기차 치킨게임을 계기로 일정 수준 이상의 시장 지배력을 확고히 다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한국과 중국의 상위 업체를 따라잡을 만한 후발 주자가 나타날 가능성이 희박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북미 시장에서는 중국산 소재를 배제하는 IRA 여파로 한국 배터리와 글로벌 완성차 업계의 협력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브리티시볼트 파산으로 유럽의 배터리 자립이 불투명해졌다”면서 “올해부터 톱티어 배터리 업체들이 시장을 과점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