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출발점에 선 허준이 펠로십

■김영훈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
허 교수, 5년간 클레이펠로 지내
아낌없는 지원 덕 필즈상 받아
韓도 단기성과에 대한 부담 덜고
긴 호흡으로 난제 풀 기회 열려


지난해 허준이 교수의 필즈상 수상과 국제수학연맹 최고 등급 승급은 한국 수학계에 대한 국민적 기대에 부응하는 국가적 경사였다. 이후 많은 분들이 어떻게 하면 이를 계기로 한국 수학계가 한 단계 더 높이 도약하고 제2, 제3의 허준이가 나올 수 있을까 묻는다. 초중고 교육 과정 개혁, 수학 영재들에 대한 멘토링, 대학생 연구 프로그램 개발, 세계적 수준의 수학연구소 설립 등은 모두 심각히 검토해볼 만한 좋은 제안들이다. 수십조 원에 달하는 과학기술 예산에서 수학이 차지하는 극히 작은 비율과 여태까지 얻은 성과나 국제적인 위상을 함께 놓고 보면 압도적으로 가성비 높은 과학기술 투자는 바로 수학임이 분명해 보인다. 여러 훌륭한 제안들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바로 허 교수 본인의 제안이다. 미국 클레이재단에서 제공하는 클레이 펠로로 지내면서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었기에 필즈상 수상이 가능했던 본인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단기 목적의 연구가 아니라 즐겁게 장기적인 큰 프로젝트를 진행할 만한 여유롭고 안정적인 환경이 마련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클레이 펠로십은 미국 클레이수학연구소에서 제공하는 연구직으로 5년 이상의 긴 시간 동안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도록 충분한 급여와 기회를 제공한다. 클레이수학연구소는 투자회사를 운영하며 쌓은 부를 사회에 환원하고자 미국의 사업가 랜던 클레이(1926-2017) 씨가 1998년 설립한 연구소로서 ‘수학 지식의 증대와 전파’를 목적으로 한다. 허 교수는 클레이 펠로십을 받고 미국 프린스턴고등연구소로 가서 필즈상 수상에 결정적인 연구를 했다. 고등연구소는 ‘지식의 추구 그 자체’를 목적으로 1930년에 설립된 연구 기관으로 모험적인 탐구를 격려하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쿠르트 괴델, 로버트 오펜하이머, 피에르 들리뉴, 에드워드 위튼와 같은 전설적 인물들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프린스턴고등연구소를 모델로 한국에도 1996년 고등과학원이 설립됐고 허 교수가 현재 수학부 석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클레이 수학 연구 펠로십은 연구 성과뿐만 아니라 지도적 연구자로 성장할 잠재력을 바탕으로 선발되며 박사 학위를 막 받은 신진 연구자에게 5년 정도의 기간 동안 최고 수준의 급여와 연구비를 제공하고 전 세계 어디든 본인이 원하는 기관에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자유를 부여한다. 허 교수가 직접 밝혔듯이 신진 연구자가 지도적 위치로 도약하는 데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허 교수의 호소에 정부와 국회가 호응해 올해부터 고등과학원 수학난제연구소에서 ‘허준이 펠로’를 선발하게 됐다. 자신만의 연구를 소신 있게 추구할 젊은 연구자들이 매년 재계약을 위한 단기적인 성과에 집중할 필요 없이 긴 호흡으로 난제에 도전하고 제2, 제3의 허준이로 도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올바른 방향을 하나 찾은 것으로 보인다. 10년 혹은 20년 안에 더 좋은 소식이 연이을 것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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