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해하기로 유명한 천재 시인 이상의 시를 물리학으로 해석한 국내 논문이 나왔다. 연구팀은 이상이 시를 통해 병적신 사회가 반복되고 있다는 통찰을 표현했다고 봤다.
광주과학기술원(GIST)은 이수정 기초교육학부 교수 연구팀이 이상의 시 ‘진단 0:1’을 물리학으로 해석한 논문을 최근 이상문학회 발간 ‘이상리뷰’에 게재했다고 19일 밝혔다.
진단 0:1은 숫자 1234567890과 가운데점(·)이 배열된 11행 11열의 숫자표로 이뤄진 시다(그림1). 행마다 가운데점의 위치를 달리해 전체적으로 보면 숫자 배열 사이로 가운데점이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형태다.
우선 연구팀은 이상의 다른 시 ‘삼차각설계도-선에관한각서6’을 토대로 이 배열을 ‘주기경계조건 모티브’로 봤다. 가장자리를 연결하면 주기적인 성질을 갖는 배열을 말한다. 가령 이런 관점에서 첫 행인 ‘1234567890·’은 ‘1234567890·1234567890·1234567890…….’와 같은 식으로 무한히 반복되는 주기로 볼 수 있다. 모든 행렬에 이런 규칙을 적용하면 기존 11행 11열의 숫자표를 더 크게 확장할 수 있다(그림2).
다만 이렇게 하면 열 방향으로 이어지는 숫자표 간 경계가 불연속적인 문제가 생긴다. 연구팀은 제목의 ‘0:1’를 하나의 명령어로 해석, 경계의 ‘0·1’ 부분(그림2의 빨간 네모) 위치를 보정함으로써 숫자표의 불연속 문제를 해결했다(그림3). ‘진단 0:1’은 숫자표의 ‘0·1’ 부분에 조작이 필요하다는 진단이란 것이다.
연구팀은 이를 통해 무한이 연속되는 숫자표 배열을 얻었고 이 배열을 평면이 아닌 도넛 모양의 입체도형 표면에 대응시켜 그 무한한 반복성을 시각화했다(그림4). 연구팀은 이상이 시공간, 즉 세상에 대해 ‘진단 0:1’이라는 진단을 내렸고 그 내용은 그의 문학 전반에 표현되는 병적인 사회가 반복된다는 통찰을 담은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연구팀은 이번 해석이 ‘주기경계조건 모티브’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상 문학에 대한 기존 접근법과 차별화된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오감도’ 등 다른 시도 이런 관점으로 해석할 계획이다. 앞서 2021년 이상의 다른 시 ‘삼차각설계도’ ‘건축무한육면각체’를 4차원 기하학과 물리학으로 해석해 주목받은 바 있다.
이 교수는 “주기성 시공간을 문학의 소재이자 배경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상의 문학적 독창성과 전위성에 대한 이해를 끌어올렸다”며 “주기경계조건 모티프는 이상의 작품을 해석하는 새로운 프레임워크이자 패러다임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