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SKY 타이틀 버리고 지방 의대로…이공계 인재 블랙홀 '의치한약수'

■이공계 '자퇴 도미노'…의·약대로 몰려간다
정부 첨단산업 글로벌 패권전쟁에
반도체 등 인재 양성 팔 걷었지만
의·약학 쏠림에 미등록 학과 속출
연대 반도체과 추가합격률 180%
"기초·첨단산업 이끌 인재가 없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이미지투데이


의·약학 계열이 대입 지원 단계에서의 선호 현상뿐 아니라 입학 이후 자연 계열 대학생의 대규모 자퇴까지 유발하면서 이공계 우수 인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있다. 교육계는 지난해 약대 학부 선발에 이어 최근 논의되고 있는 의대 증원까지 현실화할 경우 이 같은 쏠림 현상을 더욱 부채질할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가 적극 추진 중인 이공계 첨단 분야 인재 양성을 무색하게 하고 미래 산업의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의·약학 선호 현상에 이공계 자퇴 ‘도미노’=의·약학 계열 진학을 위한 자연 계열 학생들의 대규모 이탈은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일명 ‘스카이(SKY)’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종로학원의 분석에 따르면 성균관대 자연 계열 자퇴생도 2019학년도 312명에서 2020학년도 450명, 2021학년도 561명으로 최근 3년간 79.8%(249명) 증가했다. 경희대·서강대·서울시립대·이화여대·중앙대·한국외대·한양대 등 주요 11개 대학으로 범위를 넓혀도 2019학년도 전체 자퇴생의 52.6%(2901명)를 차지했던 자연 계열 학생은 2020학년도 54%(3527명), 2021학년도 61.7%(4388명)까지 늘어났다. 대학 서열화의 꼭짓점으로 여겨지는 SKY에서 자퇴가 급증하면서 연쇄적인 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재학생들의 대학 간 이동이 연쇄적으로 이뤄지면서 입학 단계뿐 아니라 중도 이탈로 인한 대학 간 경쟁력도 크게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정부 사활 건 ‘첨단 학과’ 포기하고 의대로=‘의치한약수(의대·치대·한의대·약대·수의대)’로 불리는 의·약학 계열은 대입 지원 단계에서 자연 계열 최상위권 수험생의 최우선 선택지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현재 전형이 진행 중인 2023학년도 대입 정시에서 의·약학 계열 109개교의 평균 경쟁률은 8.03 대 1로 전년도의 9.16 대 1보다 다소 낮아졌지만 수험생 전체 정시 평균 경쟁률(4.65 대 1), 서울 소재 대학 경쟁률(5.81 대 1)보다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의·약학 선호 현상은 수시 모집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SKY의 2023학년도 수시 선발 인원 가운데 318명(4.7%)이 미등록했는데 예체능 및 학과 통합 선발을 제외한 316명 중 자연 계열이 과반수인 58.2%(184명)를 차지했다. 특히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의 수시 추가 합격률은 무려 180%, 고려대 반도체공학과는 120%에 달하는 등 최근 정부가 인재 양성에 힘을 쏟고 있는 반도체 관련 학과에서 미등록자가 속출했다. 입시 업계는 수험생들이 복수 합격한 의·약학 계열로 빠져나간 결과로 추정하고 있다.


반면 전국 의대 39곳의 수시 미등록 인원은 단 12명에 불과했다. 서울과 수도권 소재 의대는 이월 인원이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최근 5년간 전국 의대 수시 이월 규모는 △2019년 213명 △2020년 162명 △2021년 157명 △2022년 63명으로 매년 급격히 줄고 있다. SKY라는 타이틀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연 계열 대신 수도권·지방 의대를 선택하고 있다는 얘기다.


◇취업난 맞물려 늘어난 의대 수요…미래 산업 기반 약화 우려=의·약학 계열 선호 현상은 최근의 전문직 선호, 만성적인 취업난과 맞물려 있다. 의대는 과거에도 고교 최우등생이 진학하는 곳이었지만 1970~1980년대만 해도 물리학과나 전자공학과 역시 자연계 최고 인기 학과로 꼽혔다. 하지만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이공계 졸업생들의 직업 안정성이 크게 흔들리자 최상위권 수험생들의 수요는 의대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물론 직업 안정성과 사회적 지위, 경제적 보상까지 보장된 의·약학 계열에 대한 선호도를 인위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 문제는 이공계 우수 인재의 수급이 부족해지면서 가뜩이나 글로벌 경쟁이 격화하고 있는 첨단 미래 산업의 근간이 약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입시 업계는 최근 정부와 의료계가 논의를 시작한 의대 증원이 이뤄질 경우 쏠림 현상이 더욱 심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부터 정부가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반도체 등 첨단 인재 양성 정책마저 무색해질 수 있는 대목이다.


2022학년도부터 문·이과 통합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도입되면서 자연 계열 학생이 SKY 인문 계열로 교차 지원하는 ‘문과 침공’을 한 후 다시 자연계 상위 학과 재수·반수에 도전하는 등 더 큰 규모의 연쇄 이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임 대표는 “입학 단계에서의 쏠림 현상뿐 아니라 그나마 뽑아놓은 학생들마저 다 빠져나가면서 사실상 국가 미래를 지탱하게 될 기초과학 분야나 첨단 산업 분야에는 최상위권 인재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봐도 무방하다”며 “의·약학 쏠림 현상이 입학 이후까지 확산되고 있다는 점을 사회적 문제로 인식해 서둘러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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