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프 미!"
2019년 10월 이른 아침. 119 종합상황실에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외국인 여성이 “남편이 샤워 중 쓰러졌다”며 울부짖었지만 영어가 원활하지 않아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119 상황요원은 위치정보시스템(GPS)과 호텔명을 물어 신고자의 신원을 파악했다. 구급대원이 호텔에 도착하기까지 소요된 시간은 15분. 다니엘 나파르(66)씨가 심폐소생술(CPR)을 받으며 고려대구로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을 땐 이미 심정지로 맥박이 느껴지지 않고 자발호흡이 없는 상태였다.
박성준 고대구로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를 비롯한 의료진들은 환자에게 달려가 기관 내 삽관(intubation)을 통해 기도를 확보하고 인공호흡기를 연결했다. 혈액검사 결과 혈액 내 칼륨 수치가 어마어마하게 높아져 있었다. 당뇨병성케톤산증(DKA·Diabetic Ketoacidosis)에 의한 고칼륨혈증(hyperkalemia)이 추정됐다. DKA는 사망에도 이를 수 있는 당뇨병의 급성 합병증이다. 설상가상 혈압이 심하게 떨어지면서 소변량도 급격히 줄었다. 전해질 이상을 빠르게 교정하려면 투석이 시급한데 나파르 부인은 프랑스어로만 소통이 가능했다. 통계적으로 심정지 상태에서 응급실에 내원한 환자의 78.6%는 사망 또는 가망없는 퇴원의 경과를 보인다. 당시 의료진 판단에도 나파르씨의 소생 가능성은 20% 남짓이었다. 동료 의료진의 기지로 영사관에 연락을 취해 통역사와 연결이 닿았다. 청천벽력 같은 말에 절규하는 나파르 부인을 다독이며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보자"는 말을 건넨 게 박 교수의 마지막 기억이다.
그로부터 두 달 가량 지났을까. 홍보팀 직원으로부터 '사랑합니다. 여러분이 내 생명을 구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담긴 라파르 부부의 영상을 전달 받고서야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되찾고 후유증 없이 컨디션을 회복해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갔음을 알게 됐다는 박 교수. 그는 "바쁜 응급실 일상을 보내다 보면 문득 '그날 중환자실로 보냈던 환자는 어떻게 됐을까' 궁금할 때가 있다"며 "분초를 다투는 상황에서 의사소통이 어려운 외국인 환자들은 병력을 파악하기 조차 어려워 안타까울 때가 많은데 영상 속 건강한 모습에 반가웠다"고 전했다.
한해 1000만 명 내외의 환자들이 전국 응급실을 찾는다. 나자르 씨처럼 샤워 도중 쓰러져 알몸으로 실려오는 환자부터 불의의 사고로 피투성이가 된 환자, 겉모습은 멀쩡한데 심장이 멎은 환자에 이르기까지. 1983년 개원 이래 서울 서남부 권역의 최상위 의료기관으로서 지역사회 건강을 지켜온 고대구로병원은 2015년 12월 보건복지부로부터 권역응급의료센터로 선정됐다.
환자가 응급실에 머무는 시간은 대부분 6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절반 가량은 2시간 이내 떠난다. 그만큼 시급을 다투는 상황이 많다. 급성 심근경색이나 부정맥이 심장마비나 심정지로 이어졌을 때 골든타임은 고작 4분. 그 안에 CPR이 시행돼야 심각한 뇌손상을 막고 사망 위험을 줄일 수 있다. 겨울철 빈도가 잦은 뇌출혈과 뇌경색의 골든타임은 3~6시간. 시술 준비 시간을 고려하면 적어도 3시간 이내 병원에 도착해야 한다. 환자들과 짧은 순간 대면하는 만큼 ‘조금만 빨리 왔다면 살릴 수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도 크다. 박 교수는 "소수의 경증 환자를 제외하곤 근본 원인을 찾아 해당 진료과에 의뢰하고 수술실 또는 중환자실, 병실 등으로 빨리 올려 보내는 게 응급의학과 의사들의 주된 임무"라며 "진료과 간 긴밀한 협진은 물론 병원 전 단계를 아우르는 응급의료체계가 잘 갖춰져 있어야 중증 응급 환자의 생존율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지난해 9월부터 서울경기 내 14개 재난거점병원 중 하나인 고대구로병원의 재난책임자로 선임되어 병원 전 단계 의료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데도 힘쓰고 있다. 병원 근무 중 틈틈이 구로소방서 구급지도의사로서 소방일지를 검토하고 구급대원 대상 정기 훈련 및 교육도 진행한다. 그는 "재난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발생할지 알 수 없다"며 "어떠한 재난이나 대량 인명 사고에도 의료적 역량을 충분히 제공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고 대응하는 데 힘쓰겠다"고 말했다.
‘메디컬 인사이드’ 코너는 보건의료계에서 주목받는 의료진과 병의원의 활약상을 전달하는 연재물입니다. 임상연구·개발과 진료 등의 영역에서 최근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의료진과 만나 숨겨진 이야기들을 인터뷰 형식으로 소개합니다. 또한 의료기관 내 다양한 진료과와 부서 차원의 협력을 통해 의료계 변화를 선도하는 센터를 직접 찾아가 생생한 현장감을 전달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