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네덜란드가 대(對)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에 동참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반도체 장비 시장을 과점한 3국이 대중국 공동전선을 구축하기로 하면서 첨단 기술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 간 패권 전쟁이 한층 격화할 것으로 우려된다. 중국에 반도체 공장을 보유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일정 부분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26일(현지 시간) 블룸버그통신은 미국·일본·네덜란드 당국자들이 이날 워싱턴DC에서 만나 대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 조치에 대한 협의를 벌였으며 27일 최종 합의에 이를 것이라고 현지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에 따라 세계적인 반도체 장비 업체인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 일본 도쿄일렉트론과 니콘, 네덜란드 ASML 등의 대중국 수출이 제한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이 조치를 공개 발표할 계획은 아직 없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특히 ASML은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에 이어 구세대인 심자외선(DUV) 노광 장비 수출에도 제동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ASML은 미국의 요구를 받은 자국 정부의 조치에 따라 2019년부터 EUV 장비의 중국 수출을 중단했지만 자동차·스마트폰·PC 등에 들어가는 범용 반도체 제조에 사용되는 DUV 장비 수출은 유지해왔다. 이번 조치로 DUV 장비 수출까지 막히면 중국은 최첨단 반도체는 물론 범용 반도체와 메모리반도체 생산까지 차질을 빚게 되는 셈이다.
일본 정부도 이번 합의로 자국 반도체 기업인 니콘에 유사한 수출 제한을 가할 것으로 보인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3국 간 이번 합의는 미국이 지난해부터 추진해온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18㎚(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 D램과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14㎚ 이하 로직칩을 중국에서 생산하는 기업에 첨단 반도체 장비를 판매하려는 미국 기업은 수출 허가를 받도록 하는 내용의 수출 통제 조치를 발표한 데 이어 일본과 네덜란드에도 동참을 요구해왔다. 반도체 장비 시장의 큰손인 일본과 네덜란드의 참여 없이는 수출 통제 효과가 떨어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최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도 반도체 규제 동참을 강하게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이 같은 조치가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꺾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ASML의 페터르 베닝크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미국의 수출 규제는 중국의 자체 반도체 장비 개발만 촉진시킬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한편 일본과 네덜란드의 조치가 실행되면 삼성과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도 장기적으로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은 수출 통제 조치와 관련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대만 TSMC의 중국 소재 공장에 대한 규제를 1년 유예한 상태지만 DUV 장비까지 수출 통제 대상이 되면 중국 공장으로의 장비 반입이 더욱 까다로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 낸드플래시 공장을, SK하이닉스는 우시에 D램 공장, 다롄에 인텔로부터 인수한 낸드 부문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2019년 초 우시 D램 공장에 DUV 장비를 도입해 생산에 활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