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관이 살인사건의 피해자에 대한 정보를 의사로부터 전달 받는다. 정보들은 특별한 외상과 내출혈이 있는지, 특이한 소견이 발견되는지, 사망 시각은 언제쯤으로 추정하는지 등이다. 이러한 내용을 알 수 있는 건 사체를 검시하고 분석한 덕분으로, 그 힘은 ‘법의학’이다. ‘CSI’ ‘NCIS’ ‘본즈’ 같은 미국의 형사·범죄물 시리즈들이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면서 법의학에 대한 관심도 커진 바 있다.
법의학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키운 건 미국이지만, 이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앞서 있는 나라는 독일이다. 최근 번역 출간된 독일의 유명 법의학자인 미하엘 초코스 베를린 주립 법의학·사회의학연구소장의 저서 ‘죽음의 키보드’는 법의학자들이 지닌 전문 지식과 능력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는 “죽음에는 아주 특수한 키보드가 장착돼 있다”며 그 키보드를 두드려서 죽음의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한다. 죽음을 둘러싼 진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저자가 책에서 주로 전하는 이야기는 범죄사건 속에 숨은 진실이다. 사람이 숨지는 유형은 자연사, 비자연사, 사인불명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으며, 법의학자가 출동하는 경우는 비자연사와 사인불명이다. 발생했을 때 대부분 범죄와 연관성부터 조사하는 일이다. 책은 각종 모살(謀殺·계획적 살해범죄)과 고살(故殺·충동적 살인) 현장과 같은 법의학의 최전선에서 소문과 침묵을 가로지르며 진실을 길어 올린 경험담이다.
법의학자들은 시신 조사를 통해 죽음 과정을 재구성한다. 피해자의 몸에 남은 상처에서 가해자의 진술과 대치되는 부분을 확인하고, 범인이 조작한 단서에서 어떤 요소가 과학적으로 어긋나는지 파악한다. 책은 그 과정을 흥미롭게 묘사한다. 스페인 40대 남성이 독일까지 날아가서 아내의 첫사랑인 남성을 칼로 살해한 사건에서, 피고인은 서로 칼을 잡으려 티격태격하다 우연히 칼날이 피해자의 몸으로 향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부검 결과 쌍방의 싸움에서 절대 생길 수 없는 14㎝ 길이의 상처가 발견됐고, 두 번 찌르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형태였다는 점을 밝혀낸다. 저자는 칼로 찔렸을 때 내장의 상처가 생기는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법정에 고무호스를 들고 갔다. 강간살인 사건에서도 마찬가지다. 피의자는 처음엔 내가 죽이지 않았다고, 나중에는 화간(和奸) 후 우발적으로 살인했다고 주장하지만 저자와 동료들이 피해자의 몸에서 발견된 각종 흔적들을 근거로 조목조목 반박하자 힘을 잃는다.
법의학이 등장하는 사건이 꼭 살인만 있지는 않다. 가상의 범행 혹은 가짜 무죄를 증명하기 위한 속임수를 찾는데도 법의학은 유용하다. 사기죄로 금고형을 받은 노인이 형을 면하기 위해 하반신 마비에 시달린다고 거짓 주장하는 일도, 부양 의무를 회피하려 친자 확인 검사를 조작하는 일도 법의학 앞에서 무용하다. 그는 우스개를 섞어 “노련한 법의학자를 속이기 위해서는 ‘덱스터’나 ‘CSI: 마이애미’ 시리즈 몇 편을 시청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일갈한다. 법의학자들은 현장 수색을 통해 엄마가 의료진의 관심과 애정을 맛보기 위해 신생아 친자식의 중병을 고의로 유도하는 ‘대리인에 의한 뮌하우젠 증후군’ 환자임을 밝혀내기도 한다.
사건을 조사할 때 사용했던 첨단 기술을 소개하는 대목도 흥미롭다. 혈흔 검출제 ‘루미놀’, 이동 스펙트럼 램프 ‘루마텍 슈퍼라이트 400’ 같은 혁신적 제품은 세제를 사용해 지운 곳에서도 혈액이나 정액의 흔적을 형광 빛으로 드러낸다. 심지어 새로 페인트칠까지 한 곳에서도 잠재적 혈흔을 찾아낸다. ‘사후 다층 CT 촬영’ 기술을 통해서는 메스로 절개하기 전부터 이미 어느 부위에서 골절이 일어났는지, 총알과 같은 금속 이물질이 있는지 등을 찾을 수 있다.
책에서 묘사한 사건들에서 법의학자의 소견은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러다 보니 성격적으로 필수불가결한 특성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중 중요한 것은 선입견을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 사망 사건을 대할 자세를 갖추고 유연하게 사고하는 일이다. 또한 무거운 책임감을 지녀야 하고, 타인과 상황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며, 누구의 의견에 기대지 않은 채 사실을 탐구하려는 태도를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1만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