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전구,사탕,퍼즐 등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일상적 재료들을 가지고 깊게 사유할 수 있는 작품으로 바꾼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elix Gonzalez-Torres·1957~1996)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개념 미술가다. 그의 아시아 최초 회고전이, 지금은 사라진 서울 중구 태평로의 삼성미술관 플라토(구 로댕갤러리)에서 2012년에 열려 국내 대중에게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한 곤잘레스-토레스의 전시가 메가 갤러리인 데이비드 즈워너(David Zwirner) 뉴욕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데이비드 즈워너는 살아생전 곤잘레스-토레스의 전시 기획을 담당했던 안드레아 로젠(Andrea Rosen) 갤러리와 2017년부터 공동으로 전속 계약을 맺고 있다.
곤잘레스-토레스의 작업은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지점에서 출발한다. 상당수 작업들은 에이즈로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연인 로스 레이콕(Ross Laycock·1959~1991)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과 연관돼 있다. 두 개의 동일한 시계가 벽에 나란히 배치된 ‘무제(완벽한 연인들)'(1987/1990)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에서 두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정확히 같은 시간을 가리킨다. 둘 중 한 시계의 배터리 수명이 다하면 교체되고, 시간은 다시 동일하게 맞춰진다. 이처럼 자신의 연인과 함께 하는 시간이 영원하기를 염원하는 곤잘레스-토레스의 작업은 매우 사적이면서도 시적이다.
그의 작업들은 작가 개인적인 내용을 넘어섬과 동시에 많은 이들의 보편적인 감수성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이는 작가가 살아생전 중요시했던 예술철학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곤잘레스-토레스는 예술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공적인 파급력을 불러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보편성은 많은 관심과 다양한 해석을 이끌어내기에 논란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곤잘레스-토레스가 사망한지 거의 30여 년이 흐른 지금 작가의 직접적인 지시나 개입 없이 ‘작가가 남긴 몇 장의 드로잉과 아이디어만’을 가지고 작가의 작업을 전시공간에 설치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의문들이 많다. 이에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재단의 회장직을 겸하고 있는 안드레아 로젠은 작가의 작품 정보 부재에 대한 책임은 전시기획자나 작품 오너에게 있어 작가의 아이디어가 작품으로 구현될 수 있고,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이번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의 곤잘레스-토레스 전시는 이같은 로젠의 발언을 뒷받침하는 듯하다. 전시된 총 4점의 설치 작업들 중 두 작품인 ‘무제’(1994~1995)와 ‘무제(Sagitario·궁수자리)’(1994~1995)는 최초로 공개됐다. ‘무제(궁수자리)’는 콘크리트 갤러리 바닥에 지름이 4m에 육박하는 두 개의 원형 웅덩이를 파고 지면과 동일한 높이로 물을 채운 작업이다. 두 원형 웅덩이는 1cm도 안되는 거리로 닿을 듯 말 듯하며, 그 안에 채워진 물들도 갤러리 지면에 넘칠 듯 말 듯한다. 다른 작품 ‘무제’는 흑백 하늘이 출력된 사진이 붙은 두 개의 대형 빌보드 판이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설치돼 있다. 설치 작업 위 조명은 일정한 간격으로, 갑자기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와 같은 음악과 함께 꺼졌다 켜지길 반복한다. 원래 이 두 작품은 1995년 프랑스 보르도에 위치한 CAPC 뮤지엄에 설치될 예정이었지만, 운영상의 문제로 연기된 후 곤잘레스-토레스가 1996년 사망하게 되면서 작가의 아이디어 형태로만 남아있었다.
곤잘레스-토레스는 이번 전시에 공개되는 작품의 의미에 대한 기록을 남겨두지 않았다. 이에 전시를 기획한 주체인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는 두 작품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다. 곤잘레스-토레스는 예술의 애매모호함 자체를 이용한 작가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개인적이지만, 누구나 자신의 작품을 실질적인 형태로 만들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작품으로 구현되지 않은 추상적인 아이디어 형태의 작업 또한 사고팔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러 경계와 해석의 여지를 남긴 곤잘레스-토레스 작업들이 이번 데이비드 즈워너 전시를 계기로 후에 어떠한 형태로 계속 우리에게 다가올지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글·사진(뉴욕)=엄태근 아트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