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북은 고사하고 종이도 귀하던 시절이라 갱지(재생용지)를 써야 했다. 신문지를 재활용해 크로키를 하려니 가느다란 연필보다는 붓으로 먹을 치는 게 나았다. 흙은 부천시 소사 쪽에서 직접 퍼왔고, 드럼통에 담아둔 채 몇 년씩 묵혀 썼다. 석고는 아무리 기다려도 굳지 않아 속이 타던, 한국전쟁 직후의 조각과 풍경이다. 먹고 살기도 힘든 시기에 미술가로, 그것도 조각가로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조각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조차 흐릿하던 시절이었다. 흙 주무르고 돌 쪼는 소리만 울려퍼지던 조소(彫塑)과 실습실 뒤쪽에 말없이 서서 바라보던 교수. 우성 김종영(1915~1982)이었다.
“부분과 전체. 형태라는 것은 부분과 전체, 그 관계에 있는거야.”
조각적 형태의 기본만 얘기하던 스승에게서 배운 제자들은 시키지도 않았건만 각자의 길을 찾아 뻗어갔다.
오롯한 한국식 미술교육을 받은 1세대 조각가 송영수(1930~1970), 최종태(91), 최의순(89), 최만린(1935~2020)의 대표작을 모은 기획전 ‘분화(分化)’가 종로구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3월 26일까지 열린다. ‘조각계의 김환기’인 김종영는 일본 유학에서 조각을 배운 후 우리 전통과 정신성을 찾는 일에 더욱 매진했고, 동서양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추상’ 조각에 이르렀다. 이번 전시는 김종영이라는 한 스승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전혀 다른 예술세계로 나뉘어 발전한 네 작가를 조명하고 있다.
송영수는 철을 이용한 조각인 철조(鐵彫)를 우리나라에 최초로 도입한 작가다. 가느다란 선으로 이뤄진 그의 작품을 두고 전후 실존주의를 고민한 자코메티나 후안 미로의 초현실적 이미지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그런 선입견 대신 묵직한 덩어리감(양감)을 포기하고도 추구한 볼륨, 구조, 공간에 대한 탐구를 살펴보면 더 흥미롭다. 작품 주변을 360도 돌아가며 감상하면 움직일 때마다 전혀 새로운 모습이 펼쳐진다.
일찍이 중학생 때 국전(國展) 수상작가로 이름을 올린 최만린은 전쟁 상흔의 극복을 보여준 ‘이브’ 연작으로 주목받았다. “동양의 모필과 서양의 연필의 차이점을 자각”한 그는 1960년대 이후 동양 미학에 기반한 본격 추상조각을 시도했다. 생명성을 주제로 한 ‘태’ ‘맥’ ‘O’ 시리즈가 대표작이다. 2020년 작고 후, 작업실을 겸했던 집이 성북구립 최만린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1953년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대에 입학한 최의순은 ‘현대미술사전’을 번역해가며 서구 조각의 흐름을 살폈고, 그 토대 위에서 자신만의 작품을 모색했다. 다양한 조형 실험을 거쳐 도달한 ‘석고 직조 작업’은 석고가 굳기 전 민첩하게 움직여 만들어야 한다. 고스란히 드러난 물성을 통해 조각의 본질을 되묻는다.
최종태의 경우 평생 ‘사람’을 만들었지만 단 한 번도 특정 인물의 형상을 빚은 적 없다. 그의 인간상은 혼돈 속에서도 살아내야 하는 인간 존재 그 자체를 추구했기에 가장 간략한 형식으로 제작됐고 ‘추상에 가까운’ 인물상이 됐다. 방탄소년단(BTS)의 RM이 소장할 정도로 현대적 감각이 탁월한 최종태의 대표작 ‘얼굴’ ‘서 있는 사람’ 등을 만날 수 있다. 서양식 인체 조각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시도한 네 작가의 공통점이 감지된다.
7일 기자간담회에서 만난 최종태 작가는 “일본인에게 미술을 배운 세대가 아닌, 우리 손으로 만든 미술대학에 입학해서 한 교실에서 공부한 순수한 토종 조각가 1세대”라고 스스로 정의했다. 최의순 작가는 “한국인으로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립하고 거기에서 출발하는 게 중요했고, 왜 만드는지, 조각예술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과정의 의미가 컸다”고 회고했다. 송영수는 요절했으나 큰 족적을 남겼고, 최만린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을 지냈다. 최의순·최종태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