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 나오는 이가 꼭 사람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온기와 향기가 문(門)보다 더 앞에서, 사람보다 먼저 환대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화사하고 따뜻한 분홍의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서울 종로구 공평동의 센트로폴리스 빌딩 내 자리 잡은 법무법인 태평양(BKL)의 공용 공간인 25층 카페테리아 앞이다. 이곳을 지키고 선 대형 추상회화는 떠오르는 신예 이희준 작가의 2020년작 ‘웰컴 오키드(Welcome Orchid)’.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환영의 난초’다. 그러고 보니 둥근 분홍빛이 연보라색이 감도는 난꽃 색이다. 이 작가는 이 그림에 대해 “우연히 들어간 한 장소에서 마주한 난꽃을 기억하며 작업했다”면서 “세심한 조형과 색감으로 공간을 분할하고 변주하는 난꽃을 상상하며 화면을 구성하게 됐다”고 말했다. 반쯤 보이는 검정 원과 분홍색 원이 겹치는 부분 위쪽으로 난꽃이 보인다.
대형 로펌의 로비를 오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환대와 환기가 필요할 듯하다. 근무하는 변호사들은 휴식과 생각의 전환이, 고객들에게는 격려와 위로가 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고대하던 계약이 성사돼 기쁜 마음으로 방문한 이에게는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고 앞으로의 성공을 축하하기에도 좋을 그림이다.
이 작가는 관찰하는 것에서 작업을 시작한다. 삶에서 관찰한 풍경들로부터 이미지를 얻고 이것을 추상회화로 변환한다. 가까운 서울 곳곳의 풍경부터 머나먼 타국의 여행지까지 그림에 담긴다. 다만 작가의 감정과 기억이 장면을 걸러내 원형·사각형 같은 기하학적 형태와 다채로운 색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추상 풍경이다. 특히 이 작업들에 대해 작가는 ‘더 투어리스트(The Tourist)’라는 이름을 붙였고 “타지에서의 이국적인 경험을 어떻게 소비하고 기억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며 작업한 회화 연작”이라고 설명했다. 여행은 짧고 추억은 휴대폰 속 작은 사진으로 저장되지만 작가는 그 순간을 떠올려 그림으로 옮긴다. 그날의 향기는 물감의 질감이 되고 감정의 깊이와 재잘거린 대화들은 작은 기호로 바뀐 것일지도 모른다.
카페 안의 햇빛이 잘 드는 남쪽 창을 바라보는 테이블 앞에도 그의 작품이 있다. ‘해, 달, 그리고 별 하나(Sun, Moon, and One Star)’다. 한낮의 이 자리에서 느끼는 태양도, 야근하며 바라보는 달과 별도 그림 속 노란 원과 잘 어울린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건만 앞에 놓인 의자도 샛노란 색깔이다. 이희준의 작품은 화면에 두텁게 올린 물감의 재질, 오밀조밀 붙어 있는 색의 띠, 얇고 섬세한 수평선과 원, 작지만 명료한 네모와 점 등을 하나하나 곱씹어 볼수록 매력이 커진다. 작가는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2018년에 고향 서울의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에 영감을 받아 추상으로 해석한 풍경 작업을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건축물과 거리의 모습이 작품에 담기고는 한다.
1980년 설립된 법무법인 태평양은 중구 서소문로에서 18년을 보내고 1998년 강남구 역삼동으로 이전했고 22년 만인 2020년 지금의 종로구 공평동으로 옮겨왔다. 센트로폴리스 B동의 10층부터 26층까지를 사용하며 750여 명의 전문가를 포함해 약 1300명이 상주한다. 이 건물이 지어지기 전인 2015년에 도시환경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대규모 발굴 조사가 진행됐고 조선 한양의 골목길과 건물터가 거의 온전한 형태로 발견됐다. 건물 지하에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자리 잡은 까닭이다. 풍경과 추상이 겹치고 장면과 기억이 포개진 이희준의 작업은 조선시대 유적과 최신식 고층빌딩이 공존하는 건물의 성격과도 묘하게 닮았다.
사실 법무법인 태평양에 있는 로비의 그림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26층 대회의실의 ‘밍크 고래’다. 화제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고래 모티브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됐다. 한쪽 벽을 통째 차지한 미국 사진작가 브라이언트 오스틴의 ‘밍크 고래(Minke Whale Composite)’다. 작품을 고른 태평양 측은 “생각이 복잡할 의뢰인들에게 조금이나마 안식을 드리고 마음껏 헤엄치고 활개치며 더 성장”하라는 바람을 담았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우영우가 고래를 좋아하게 된 이유다. 극중 우영우의 남자친구 이준호가 커다란 고래 사진을 보여주던 곳, 우영우의 상상 속 고래가 고층빌딩 사이를 유영하듯 떠다니던 곳이 바로 여기다.
깨끗한 바닷물을 뚫고 고래 표면에 와 닿은 빛이 찬란하다. 푸른 투명함이 눈부신 그 곳을 커다란 고래가 헤엄친다. 오스틴은 독학으로 사진을 공부했다. 고래를 찍기 위해 직접 바다 깊은 곳으로 잠수했다. 예술사진일 뿐만 아니라 연구 자료로서도 가치를 갖는 사진이 됐다. 고래를 찍는 이유는 단순하지만 묵직하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 나아가 우주와의 관계까지 가늠해 보기 위해서다. 작가는 자신의 고래 사진이 실제 크기 그대로 작품이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곳 태평양 사옥의 고래는 폭 4m로 조금 축소됐다. 벽이 작품보다 좁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작품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갈 수 없는 크기라 26층까지 짊어지고 계단을 통해 옮긴 진땀 나는 뒷얘기가 전해진다.
회의실 밖 로비에는 오스틴의 또 다른 고래 사진이 있다. 새파란 바다 속으로 방금 막 뛰어든 고래의 꼬리만 촬영한 ‘안녕(A Farewell)’이다. 물 밖으로 나왔던 고래의 마지막 모습인 셈이다. 고래는 다른 어떤 부위보다 꼬리에 에너지가 쏠려 있고 그 힘으로 헤엄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푸른 고래 꼬리가 내뿜는 힘이 사진 밖까지 뻗어나오는 듯하다. 오스틴의 관심사는 고래를 넘어 태양에 이르렀다. 엘리베이터 홀 건너편, 반대쪽 로비에서는 오스틴의 ‘해, 물, 존재(sun, water, being)’ 시리즈의 하나인 ‘나는 여기에(I’m Here)’를 볼 수 있다. 태양의 표면을 촬영한 작품인데 매일 뜨고 지는 해가 날씨와 대기 상태에 따라 매번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게 신비롭다.
태평양 사옥은 각 층 곳곳에 작품이 전시돼 있다. 그림뿐 아니라 가구도 눈길을 끈다. 26층 로비 끝 창가 쪽에는 프랭크 게리의 ‘위글 체어(Wiggle Chair)’가 스툴(작은 탁자)과 세트로 놓여 있다. 낱장의 골판지들을 겹쳐 제작한 가구다. 기상천외한 건축디자인으로 유명한 게리는 골판지를 자른 단면의 물결무늬가 서로 엇갈리도록 겹치면 나무만큼 단단하면서도 유연성이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구불구불하다는 뜻을 가진 위글 체어가 탄생했다.
그 옆은 찰스 임스와 레이 임스 부부가 만든 것으로 유명한 ‘임스 체어’다. 여러 종류의 임스 체어 중에서도 저렴한 가격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합판으로 제작한 라운지 체어인 ‘LCW(Lounge Chair Wood)’ 한 세트가 자리잡고 있다.
전통 있는 로펌이라 오래전 수집한 소장품들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다. 윤영자의 청동 조각 ‘새’는 태평양의 아이콘이 된 고래 꼬리만큼이나 탄력 있다. 김영중의 청동 조각도 구불구불한 역동성이 탁월하다. 제일 오래된 그림은 근대미술가 최영림(1916~1985)의 1960년대 작품 ‘가족’이다. 작은 화면이지만 여성의 누드를 천진한 자태로 그려 자연에 동화된 인간의 생명력을 드러낸다. 축적된 시간 속에 저력을 품고 있으며 더 큰 세상을 열어주고자 하는 태평양의 정신이 로비의 그림에도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