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수출로 먹고산다. 변변한 부존자원도 없이 작은 땅덩어리에서 인구 5000만 명밖에 안 되는 나라가 세계 10위 안에 드는 경제 대국이 된 것은 다 수출 덕분이다. 수출이 끊긴 대한민국을 상상해보라. 암흑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 수출 전선에 문제가 생겼다. 세계 경기가 그리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몇 개월째 수출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이상 징후다. 이 징후의 근본 원인은 반도체 수출의 급격한 감소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소자 업체는 물론 소재·부품·장비 업체 모두 수출이 줄고 있다. 재고는 늘어나고 보유한 현금은 바닥날 지경이다. 공장을 안 돌리고 직원을 해고할 수는 없으니 공장을 돌리다 보면 또 재고가 늘어난다. 한숨으로 얼룩진 풍경이다.
그런데 해외 경쟁 국가인 미국·유럽·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정부가 설비투자에 대해 수십%에 달하는 세액공제를 해주는 것도 모자라 아예 공장을 짓는 데 수조 원씩 보조금을 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8월 527억 달러(약 67조 원)의 보조금 지원과 25% 설비투자 세액공제 내용을 담은 반도체과학법에 서명했다. 일본은 자국 반도체 국산화를 위해 결성한 ‘드림팀’ 라피더스에 1100억 엔(약 1조 1000억 원)을 지원한다. 대만은 올 1월 자국 반도체 기업 연구개발비(R&D) 세액의 25%를 공제해주기로 했다. 대만의 대표 반도체 기업 TSMC는 반도체 불황에도 R&D 비용을 전년 대비 20%나 올리겠다며 정부에 화답했다. 각국 대학들은 정부에서 나온 연구개발비를 듬뿍 지원받아 새로운 반도체 인재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기회에 반도체 산업의 싹을 틔우는 중국을 밟고 한국마저 쓰러뜨리려 한다. 처참한 국가 경쟁의 단면이다. 이대로 가면 2030년 이후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미래는 암울할 뿐이다.
반도체 업계를 배부른 양들로 바라보는 시각, 세제 혜택을 산업 측면이 아니라 기업에 돈을 쥐어주는 것으로 착각하는 몰지각, 산더미 같은 규제를 인권과 지구 환경으로 포장하는 안일함, 평등으로 무장해서 조금만 커나가도 끌어내리려고 하는 피터팬 선호 증상. 대한민국이 정녕 기업인들을 위한 나라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반도체 기업들은 경영하기 좋은 땅을 찾아 유목민처럼 대한민국을 떠날 것이다. 그리고 남는 것은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는 정쟁과 만시지탄일 것이다.
정부가 마음을 다시 잡았다. 앞으로 국가를 먹여 살릴 국가전략기술산업이 제대로 클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한다. 그 첫 번째로 국가전략기술에 대한 설비투자에 큰 폭의 세액공제를 제공해주려고 한다. 대·중견기업에는 15%, 중소기업에는 25%만큼 투자분에서 세금을 깎아주겠다는 것이다. 이번 정책으로 반도체는 물론 디스플레이·2차전지·바이오와 같은 미래 전략 부문의 투자가 늘어나고 기업의 경쟁력 강화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국회에 상정된 세법개정안은 바로 통과돼야 한다. 물론 외국에 비해 지원이 충분하냐에 대한 논의는 더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더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논의에 시간이 걸린다면 정부안을 일단 수용하고 천천히 추가 논의를 하든 해야 할 것이다.
미국 주도의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는 종언했다. 지금은 패권 경쟁, 블록화 경쟁, 물량 지원 경쟁의 시대다. 대한민국이 이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래서 후손에게 먹고살 만한 나라를 남겨주려면 당장 결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간신히 세계 일류로 만든 산업을 어떻게 유지하고 성장시켜나갈 것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