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말 기준 국내 퇴직연금 적립금은 총 296조 원 규모였다. 이 중 86%인 255조 원은 정기예금과 같은 원리금 보장형으로, 14%인 40조 원은 펀드와 같은 실적 배당형으로 운용했다. 개인연금도 다르지 않다. 보험·신탁·공제 등이 차지하는 비중은 85%에 달하고 펀드는 15% 수준에 불과하다. 즉 국내 퇴직연금의 노후 보장 수준은 연금이 유지되는 기간 동안 국내 정기예금 금리의 평균 수준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국내 정기예금 금리가 4%대까지 급상승하며 2008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보였다. 동시에 주식과 채권시장이 하락하면서 퇴직연금을 비롯한 자금들이 예금으로 대거 이동했다. 기대수익률을 높이려고 과감히 투자했던 자금들이 손실을 보는 상황에서 위험이 매우 낮은 예금이 그간 볼 수 없던 고금리를 제시하니 이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 선택이 장기 자금인 연금 운용에 합리적일까. 과거를 돌아보자. 2008년 금리는 5%대였고 당시에도 매우 매력적인 금리로 평가됐다. 그러나 간과한 것이 있으니 바로 연금 운용 기간이다. 그 당시에 가입한 고객들이 연금 운용 기간에 맞춰 30년 만기로 가입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잘하면 3년 만기 정기예금에 가입했을 것이고 대부분 1~2년 만기 정기예금에 가입했을 확률이 높다. 상품 구조상 고금리의 초장기 예금 상품은 금융기관이 제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기가 도래한 2010년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고 급격한 경기 침체가 예상되자 각국 정부들이 금리를 빠르게 2%대까지 낮췄다. 정기예금 가입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또 1~2년 만기의 저금리 정기예금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주식시장은 빠르게 반등하며 회복세를 보였고 채권 금리는 하락해 이후 10여 년간 기록적인 수익을 얻었지만 금리는 유럽 경기 둔화 등 다양한 이유로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정기예금 가입자들은 같은 기간 당연히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을 것이다. 고금리 시대에 정기예금 가입은 ‘단기적으로’ 안정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금리가 변동하기에 항상 합리적일 수는 없다.
최근 상황도 유사하다. 코로나19 발생 이후 금리 인하에 따른 유동성 확대로 각종 자산들은 기록적인 수익률을 보이며 ‘머니 무브’를 일으켰다. 하지만 2021년 하반기부터 미국을 시작으로 한 금리 인상을 기점으로 자산 시장이 하락했고 투자에 대한 위험 때문인지 투자자들은 대거 예금으로 이동했다. 다시 고금리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시기가 된 것이다.
다만 고금리는 영원하지 않다. 예금은 시간이 흐르면 가입 금리가 하락할 가능성이 있는 중장기 변동성이 존재한다. 현재 금리가 향후 십수 년간 최고 금리일 수 있고 단기간에 급격한 저금리로 진입할 수도 있다. 자산 가격이 하락한 상태에서 높은 금리는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만 가격이 저렴해져 장기 기대수익이 훨씬 높아진 주식과 채권이 연금과 같은 장기 상품에는 더욱 매력적일 수 있다. 또 단기 고금리를 좇으면 낮은 가격대에 장기 투자를 개시할 기회를 놓친다는 사실도 간과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