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업체인 대만 TSMC가 반도체 수요 둔화에 따른 영향으로 유럽 내 신규 공장 설립 계획을 2년 미뤘다는 대만 현지 보도가 나왔다. 여기에 전체 매출의 4분의 1가량을 차지하는 최대 고객인 애플이 주문량을 줄이는 등 TSMC의 올해 투자 전략에 균열이 생길 조짐이 보인다.
20일 대만 경제일보에 따르면 TSMC는 독일에서 올해 착공할 것으로 알려졌던 신규 반도체 공장(팹) 건설 계획을 2025년으로 2년 정도 미뤘다.
TSMC는 유럽에서 늘어나는 자동차 반도체 칩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독일 드레스덴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해 반도체 공장을 설립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최근 자동차 반도체 공급이 안정세를 찾고 인피니언·르네사스 등 차량용 반도체 기업들이 잇따라 대규모 투자에 나서자 TSMC가 기존 계획을 재검토하고 나선 것이다.
매출에서도 악재가 불거졌다. 해외 정보기술(IT) 전문 매체인 폰아레나 등이 내부 정보 유출자를 인용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애플은 최근 TSMC에서 주문하는 반도체 물량을 12만 장가량 취소했다. 취소한 물량 중에는 최첨단인 3㎚(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애플은 TSMC의 전체 매출의 25%를 차지하는 최대 고객이다. TSMC는 애플 아이폰의 두뇌에 해당하는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생산을 맡고 있다. 애플의 주문이 줄어들면 TSMC는 매출 손실이 불가피하다. 업계에서는 애플이 글로벌 경기 침체, 웨이퍼 가격 인상 등의 영향으로 주문을 줄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반도체 다운턴(하강 국면)이 길어지면서 견고했던 TSMC의 시장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투자의 달인’으로 불리는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은 지난해 3분기에 41억 달러를 들여 매입한 TSMC의 주식 6010만 주 중 86.2%에 달하는 5180만 주를 팔아 치웠다. 반도체 수요 둔화로 올해 실적이 악화할 것이란 판단 때문이다. TSMC는 올해 1분기에 매출이 5% 감소할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TSMC는 지난해 반도체 한파 속에서도 최신 공정에 대한 주문 증가 등의 영향으로 4분기 13조 3100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호실적을 이어갔지만 올해 들어 불황에 따른 여파가 조금씩 미치는 모습이다. 최근에는 올해 투자 규모를 지난해보다 최대 12%가량 줄이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업계에서는 최근 TSMC의 상황이 파운드리 점유율 격차 좁히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삼성전자(005930)에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의 1분기 적자 가능성이 제기되는 상황에서도 미래를 위한 공격적인 투자를 늦추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황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17일 후공정을 담당하는 천안·온양 사업장을 찾아 강력한 투자 기조를 재확인했다. 이 자리에서 이 회장은 반도체(DS) 부문 경영진을 모두 불러 모아 “어려운 상황이지만 인재 양성과 미래 기술 투자에 조금도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최근에는 일부 설비를 먼저 지어 향후 주문에 대비하는 ‘셸퍼스트’ 전략에 활용할 평택캠퍼스 5공장(P5) 기반 공사를 시작하기도 했다.
다만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이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수율(완성품 중 양품 비율) 확보가 필수라는 반응이다. 업계 관계자는 “4나노에서 TSMC의 수율이 80%, 삼성전자가 50% 수준으로 아직 격차가 크다”며 “공격적인 투자로 비교 우위를 점하려면 최소한 TSMC 수준의 수율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정부 또한 적극적인 지원책으로 뒷받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TSMC의 경우 대만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각종 지원책을 마련해 ‘공기업’ 수준의 혜택을 보고 있다. 이와 달리 한국은 설비투자에 대해 세액공제 지원을 해주는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을 뒤늦게 마련했지만 야당의 반대에 막혀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