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약·의료계의 ‘모럴 해저드’로 촉발된 마약성 진통제 과다 복용 문제가 최근 몇 년 사이 ‘펜타닐 사태’로 악화해 미국 사회의 최대 우려로 떠올랐다. 1년에 수만 명이 자·타의에 의한 펜타닐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면서 미국인의 기대수명은 25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내려 앉았다. 이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취임 직후부터 펜타닐 위기 해결에 사활을 걸었지만 사태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지난해 1~8월 약물 과다복용으로 숨진 미국인은 약 10만 7000명에 달했으며 이 중 펜타닐로 인한 비중은 약 3분의 2를 차지한다. 펜타닐은 말기 암 환자나 척추질환 등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에게 사용하는 초강력 마약성 진통제로 얀센이 1960년대 개발했다. 뾰족한 연필심에 살짝 묻힐 정도의 양인 2㎎만으로도 죽음에 이를 수 있어 신중한 사용이 요구되지만, 미국 사회는 펜타닐을 적정하게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미국에서는 펜타닐의 '원조' 격인 오피오이드 과다복용 문제가 이미 심각한 상태였다. 한국 보험연구원에 따르면 미국은 1990년대부터 의료계에서 비(非)암성 만성통증에도 오피오이드를 처방하기 시작하면서 약물 과다복용 사망자가 크게 늘었다. 미국 민간의료보험이 대체치료를 보장하지 않아 의사들이 즉각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오피오이드를 과잉 처방했기 때문이다. 미국 제약업계가 오피오이드 남용 및 중독 위험성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영향도 컸다.
이런 상황에서 제조가 쉬운 '합성 오피오이드'인 펜타닐이 소셜 미디어에서 불법적인 경로로 광범위하게 유통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공급원으로는 멕시코 마약조직들이 거론된다. 이들은 중국 화학업체에서 펜타닐 원료를 공급받아 펜타닐을 제조, 이를 헤로인·코카인 같은 마약에 첨가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미 국경수비대가 올해 2월 초까지 남부 국경에서 압수한 펜타닐 분량만 해도 9400만 파운드(약 4264㎏)에 달한다. 이는 미국 전체 인구의 5배를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양이다.
문제는 불법 마약을 구매하는 이들이 해당 마약에 얼마나 많은 펜타닐이 들어있는지도 모른 채 약물을 복용한다는 점이다. 의료비가 비싼 미국에서 저소득층이 진통을 가라앉히기 위해 합·불법 펜타닐에 의존하다가 중독이 되는 경우도 많다. 그 결과 미국 15~19세 사이에서 의도하지 않은 약물 과다복용에 의한 사망은 2018년에서 2021년 사이 150% 급증했다. 최근 약물 과다복용은 자살을 제치고 45세 이하 미국인의 사망원인 1위로 올라섰다. 미국인의 기대수명이 25년 만의 최저치인 76.4세로 내려앉은 배경에도 불법 펜타닐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고 FT는 진단했다.
'펜타닐 위기 해결'이 재선 도전을 앞둔 바이든 대통령의 최대 과제 중 하나가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앞서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펜타닐 문제 해결을 주요 국정과제로 삼고 중독 치료 확대 등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 왔다. 하지만 몇 달간 약물 과다복용률이 근소하게 감소하는 데 그쳐 국경 통제 강화, 소셜미디어 단속 등 더 강력한 정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이에 미국은 3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리는 유엔 마약위원회 회의에서 중국·인도 등에 펜타닐 원료 수출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도록 압박할 계획이다. 중국은 2018년께부터 자국의 펜타닐 원료 생산자를 단속하며 미국에 협조했지만, 지난해 낸시 펠로시 당시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 이후 협력 채널을 사실상 닫아둔 상태다. 일각에서는 최근의 상황이 미국과 중국의 ‘21세기 신(新) 아편전쟁’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김태영 기자 youngki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