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과 벤처기업 등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달라는 취지로 정부의 혜택을 받고 어음을 발행하게 된 국내 초대형 투자은행(IB) 증권사들이 실제로는 대기업에만 실탄을 쏟아부은 것으로 나타났다. 고용 확대와 자본시장 활성화의 밑거름이 될 ‘모험자본’을 회피하고 ‘안전자본’에만 대형 증권사들이 투자하면서 손쉽게 돈을 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경제가 21일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증권사 발행어음 조달 및 투자 현황’ 자료에 따르면 미래에셋증권·NH투자증권·한국투자증권·KB증권 등 초대형 IB 4개사는 지난해 9월 기준 발행어음을 통해 마련한 투자금 총 28조 5012억 원 중 3017억 원만 스타트업·벤처기업에 투자했다. 이는 전체 투자금의 1.05%에 불과하다.
증권사별로 보면 KB증권과 한국투자증권은 스타트업에 투자를 전혀 하지 않았다. 두 증권사는 각각 발행어음으로 6조 7860억 원, 11조 9502억 원씩을 조달하고도 돈을 다른 투자처에만 투입했다. 미래에셋증권은 스타트업에 전체 발행 규모의 1.4%인 350억 원만 투자했다. NH투자증권은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에 각각 33억 원, 450억 원을 투자했다. 이들에 대한 투자 비중은 0.1%와 1.1%에 그쳤다.
초대형 IB 증권사들은 스타트업과 벤처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에 대한 투자도 미미해 빈축을 샀다. 실제로 NH투자증권이 중소기업에 투자한 금액은 2019년 말 기준 6029억 원(18.3%)에서 지난해 9월 5306억 원(13.3%)으로 감소했다. 같은 기간 한국투자증권과 KB증권도 중소기업 투자 비중을 30.1%에서 28.4%, 2.1%에서 1.0%로 각각 줄였다. 미래에셋증권은 벤처기업에 이어 중소기업에도 투자를 집행하지 않았다.
이들 초대형 IB 증권사는 대신 대기업·중견기업에 투자를 집중했다. 미래에셋증권은 발행어음으로 조달한 자금 중 2조 4629억 원을 대기업·중견기업에 투자했다. 전체 투자액의 98.6%에 해당한다. KB증권의 대기업·중견기업 투자 비중 역시 93.5%에 달했다. 두 증권사는 중견기업도 아닌 순수 대기업에만 각각 86.5%, 83.3%의 투자를 몰아줬다.
이와 함께 NH투자증권의 경우 대기업·중견기업에 대한 투자 비중을 2019년 말 66.5%에서 지난해 9월 74%로 늘려 잡았다. 한국투자증권도 같은 기간 이 비중을 43.9%에서 52.5%로 높였다. 투자금을 회수하기 편한 쪽에만 어음 발행으로 확보한 자금을 활용한 셈이다.
금융투자 업계와 정치권은 초대형 IB 증권사들의 이 같은 발행어음 투자 행태가 제도 도입 취지에 어긋난다고 입을 모았다. 앞서 정부는 2016년 8월 모험자본 활성화를 목적으로 그동안 은행만 할 수 있던 어음 발행을 자기자본 4조 원 이상 초대형 IB 증권사들에도 허용했다.
이에 따라 발행어음 인가를 받은 증권사 4곳은 자기자본의 200%까지 단기어음을 발행해 기업에 투자할 수 있게 됐다. 발행어음은 증권사가 자체 신용을 바탕으로 발행하는 만기 1년 이내의 단기금융 상품이다. 특히 증권사 발행어음은 은행과 달리 가입 요건이 까다롭지 않다는 강점이 있다.
IB 증권사들은 규정상 발행어음 조달 자금의 50%를 기업금융 관련 자산에 투자해야 한다. 부동산금융에는 30%까지 넣을 수 있다. 다만 투자 대상이 되는 기업 규모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은 없는 상태다. 고객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수익을 내줘야 하는 IB 입장에서는 투자금 회수가 불확실한 스타트업·벤처기업을 외면하기 쉬운 요건이다.
윤 의원은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 확대를 목표로 IB에 어음 발행을 허용했으나 실적은 대단히 미흡한 상황”이라며 “IB 발행어음이 자금 공급의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벤처기업·스타트업 지원 실적에 비례해 한도를 늘려주는 등의 제도 개선을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수익률 방어를 이유로 대기업에만 대출해주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라며 “제도의 취지를 살리려면 기업금융 내에서도 중소 벤처에 대한 투자를 일정 수준 이상 해야 한다는 식의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