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반도체 업계 동료 다수가 해외로 스카우트되는 현실을 보며 기술 유출은 국부 유출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동시에 특허권을 갖고 있다면 이런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죠. 마침 특허청이 반도체 업계 출신의 특허심사관을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을 결심했습니다. 그동안 반도체 산업 현장에서 쌓아온 노하우를 통해 우리나라가 반도체 초격차 최강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23년 이상의 풍부한 현장 경험과 지식을 갖춘 ‘반도체 베테랑’들이 국내 반도체 산업 보호와 육성을 위해 특허청에 모였다. 치열해지는 반도체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삼성전자(005930)·SK하이닉스(000660) 등 국내 반도체 기업의 우수 인력이 중국 등 해외 기업으로 이직해 핵심 기술이 유출되는 것을 막고 반도체 관련 특허 심사 기간을 단축해 빠르게 변하는 시장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도록 하기 위해서다.
특허청은 23일 ‘반도체 분야 전문임기제(나급) 특허심사관’ 30명을 최종 선발했다고 밝혔다.
전문임기제는 전문적 지식이나 기술 등이 요구되는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임용되는 임기제 공무원(5급 상당)으로 최초 2년 근무 후 최대 10년까지 근무 기간 연장이 가능하다. 특허청은 “국내 우수한 반도체 인력들이 경쟁국으로 넘어가면서 발생하는 핵심 기술 유출 방지가 가장 큰 목적”이라며 “반도체 특허 심사 기간도 현재의 14~16개월에서 11개월 내로 3~5개월가량 단축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설명했다.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2018년부터 2022년 7월까지 적발된 첨단 기술 해외 유출 건수는 83건 중 반도체·전기전자·자동차 등 한국의 주력 산업이 69건으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특히 기술을 유출한 사람들의 절반 이상(56%)이 퇴직자였다. 특허청의 이번 합격자 및 지원자 현황을 보면 민간의 우수 퇴직 인력을 공공 영역에 활용하려는 특허청의 새로운 실험이 상당히 성공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모집 원서 접수 결과 175명이 지원해 6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통상 전문임기제 경쟁률이 2~3 대 1가량인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으로 지원자가 몰린 셈이다. 특히 지원자 중 상당수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전·현직 근무자였고 해외 기업 경력자의 국내 유턴 지원자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종 합격자들 중 현직자 비율이 90%에 달할 정도로 최신 기술 동향에 정통한 반도체 분야 베테랑 전문가들이었고 반도체 분야 평균 경력은 23년 9개월, 석·박사 학위 보유율은 83%나 됐다. 최고령 합격자는 60세(1963년생), 최연소 합격자는 41세(1981년생)로 합격자 평균 연령은 53.8세다. 류동현 특허청 차장은 “합격자 30명 포함해서 이번에 175명의 지원자 중 150명 정도가 반도체 분야 종사자들이었다”며 “퇴직 인력들에 의한 기술 유출 방지 목적을 위한 설계대로 반도체 분야의 핵심 인력들이 많이 지원했고 이런 민간의 수요가 굉장히 많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반도체 베테랑들로 구성된 특허심사관 채용으로 반도체 산업 성장의 걸림돌로 지적돼오던 특허 심사 기간도 단축될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나라의 반도체 관련 특허 심사 처리 기간은 2021년 기준 12.2개월에서 최근 특허 출원 증가로 14~16개월로 지연되고 있으며 앞으로 더 길어질 가능성이 높다. 반면 경쟁국인 일본은 10개월, 중국은 12개월로 우리보다 빠르다. 특히 특허심사관 1인당 처리 건수는 197건으로 169건인 일본은 물론 69건인 미국과 59건인 유럽보다 많다. 특허심사관 부족에 따라 특허 심사 품질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류 차장은 “이번 반도체 전문 특허심사관 투입으로 2026년까지 반도체 특허 심사가 11개월대까지 단축될 것으로 기대된다”며 “현장에서 가장 최신 기술을 연구하다 왔기 때문에 처리 기간뿐 아니라 심사 품질도 굉장히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채용에 합격한 50대 A 씨는 서울경제와의 전화 통화에서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으로 반도체 산업 현장은 매일매일이 전쟁터인데 반도체 기술 특허가 신청에서 등록까지 2년 가까이 걸리는 점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며 “반도체 기술은 누가 선점하느냐가 중요한데 특허 기간이 길어지는 것은 국가 반도체 산업 경쟁에 발목을 잡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30년 이상의 경험을 활용해 국가 반도체 산업 발전에 이바지하겠다”고 힘줘 말했다.
한편 특허청은 이번 채용의 성과를 높이 평가해 올 하반기에도 반도체 분야 전문 특허심사관 추가 채용을 검토하고 있으며 성과에 따라 행정안전부 등과 협의해 2차전지 등 다른 첨단 기술 분야로 확대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