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유력 인사들을 겨냥한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한 가운데, 이 전쟁에서 국민 영웅으로 거듭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다시금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고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2일 보도했다.
젤렌스키 정부는 최근 몇 주간 유력 인사들을 겨냥한 대대적인 부패 단속에 나섰다. 지난 1월 말에는 키이우, 수미,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헤르손, 자포리자 등 5개 주 주지사와 국방부 차관, 검찰 부총장, 대통령실 차장, 지역 개발 담당 차관 2명 등 고위인사 10여 명을 부패 혐의로 물갈이했다.
경질된 한 고위 인사는 구호물품 운송을 위해 기부된 차량을 사적으로 유용하고 기업인의 포르쉐를 몰고 다닌 혐의를 받는다. 또 다른 고위 인사는 40만 달러(약 5억 원)에 달하는 뇌물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한때 젤렌스키 대통령의 후원자였던 유력 기업가 이호르 콜로모이스키와 전·현직 고위 공직자를 겨냥해 가택 수색에도 나섰다.
하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의 측근인 올렉시 레즈니코우 국방장관은 부패 스캔들에 연루돼 해임설이 제기됐으나 결국 자리를 지켰다.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이들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전쟁 초기 뉴스 콘텐츠를 통제하는 등 미디어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면서 권위주의의 조짐을 보인다고 비판한다.
소식통들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잠재적인 정치 라이벌인 발레리 잘루즈니 총사령관이 매체 인터뷰를 하려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데 승인이 떨어지는 일이 드물다고 전했다.
WSJ은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우크라이나 내에서 제기됐던 정부 관료 부패 의혹이나 정치적 라이벌 문제 등이 러시아 침공에 맞서 온 나라가 단합하면서 잠시 가려졌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쟁 발발 무렵 젤렌스키 대통령의 인기는 시들해진 상태였다. 코미디언 출신 45세의 젤렌스키 대통령은 2019년 기성 정치에 대한 젊은 세대의 반발 속에 결선투표 기준 73%가 넘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됐으나 전쟁 발발 직전에는 신뢰도가 28%(키이우국제사회학연구소 여론조사)로 곤두박질쳤다.
2021년 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접경에 병력을 구축했을 당시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의 침공 위협이 과장됐다며 자국민들에게 “공포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서방 관리들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내 부패와 싸우겠다는 공언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데 대해서도 실망감을 표시했다.
그런 와중에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침공하자 분위기는 급변했다. 우크라이나의 항전에 수도 키이우가 며칠 만에 함락될 것이라는 서방의 예상은 빗나갔고, 젤렌스키 대통령의 국내 인기가 치솟아 정계에서 비판의 목소리는 사그라졌다. 이후 동부 최전방 부대를 방문하고 미국을 찾아 대대적인 지원 약속을 받아오는 등 국내외에서 입지를 다져 왔다.
여전히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한 여론은 우호적지만, 이는 무조건적인 지지가 아니라고 정치평론가들은 지적한다. 전방에서 소모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우크라이나 내 정치적 문제는 대외적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당장 미국에서도 우크라이나를 무한정 지원할 수만은 없다는 목소리가 꽤 높다.
키이우에 있는 한 서방 외교관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는 애초에 서방을 움직이는 것이 중요했겠지만, 그 모멘텀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부패 의혹, 정치적 적수, 엉망인 개혁 과정 등 모든 흙먼지가 되돌아올 것”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