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 보조금이 뜨거운 감자다. 우리 기업 입장에서는 돈을 받자니 미국 정부의 노골적인 간섭을 용인하게 되고, 안 받자니 미국 투자에 한두 푼이 드는 게 아닌 만큼 아쉬울 수밖에 없다.
동병상련 격인 대만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 TSMC를 한 번 보자. TSMC는 지난해 말 대만 타이난에서 3㎚(나노미터·10억분의 1m) 칩 양산 행사를 열었다. 먼저 3나노 칩을 만든 삼성전자를 의식한 이벤트였지만 정작 이 행사를 연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보름여 전에 TSMC의 팹이 건설 중인 미국 애리조나에서 5나노 칩뿐 아니라 3나노 칩까지 만들기로 확정한 것이 대만 여론을 자극한 탓이다. ‘첨단 칩을 다 미국에서 만들면 대만이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는 내부 우려가 빗발쳤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급하게 타이난에서 행사를 연 것이다.
당시 TSMC의 애리조나 행사에는 팀쿡(애플), 젠슨황(엔비디아) 등 대형 팹리스(반도체 설계) 최고경영자(CEO)들도 참석했다. 만면에 미소를 띤 미국 CEO들도 속내는 복잡했을 것이다. 인건비가 비싼 미국에까지 팹이 만들어지는 ‘팹의 지역화’는 조건반사적으로 ‘팹이 덜 효율적이 된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클러스터의 이점을 못 누리게 되니 추가로 팹을 만들 때, 또 그 팹에서 칩을 만들 때 훨씬 더 많은 돈을 투입해야 한다.
가뜩이나 칩이 고도화되면서 제조 과정에서 이전보다 훨씬 많은 프로세스를 밟아야 해 자본 의존도가 커지고 있다. TSMC·삼성전자의 자본 투자가 점점 커지는 데는 팹의 분산화 경향도 그 뿌리에 작용하고 있다. 전쟁의 위험과 팹의 아시아 의존이 심해지면서 소형화된 팹을 여러 곳에 분산하는 것이 칩 시장에서 새 트렌드가 되고 있다. 이는 비효율을 낳아 더 많은 자본의 투입을 초래하는 연쇄적 악순환으로 귀결되고 있다.
지금은 너도나도 ‘메이드인 USA 칩’을 쓰겠다고 미국 팹리스들이 손을 들고 있지만 얼마만큼 늘어난 비용을 감내 혹은 감수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세상 일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미국으로 첨단 칩 공장이 다 나가고 있다’는 대만의 우려는 객관적으로 보면 호들갑에 가깝다. TSMC 공장은 대만·중국·싱가포르에 있다. 넓게 분포된 것 같지만 TSMC 매출의 96%는 대만 팹에서 나온다. 더구나 16나노 이하 첨단 칩을 만드는 팹은 100% 대만에 있다. 중국 공장이라고 해봐야 난징에 있는 자동차 칩을 만드는 28나노 팹이 전부다. 전체 낸드플래시의 40%, D램의 48%를 중국에서 만드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보다는 보조금을 받을 때 받는 타격이 훨씬 덜하다.
그런데도 TSMC는 언론을 통해 TSMC가 미국에서 팹을 확장하더라도 ‘N 마이너스 1(N-1)’의 원칙을 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흘렸다. 미국에서 만들어지는 가장 최첨단 노드가 ‘N노드’면 대만은 그 노드보다 하나 아래인 ‘N-1노드’를 만들 것이라는 뜻이다. TSMC의 핵심은 타이난이지 결코 애리조나가 아니라고 밝힌 셈이다.
흔히 애리조나 팹이 미국 최초의 TSMC 팹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1996년 TSMC는 포틀랜드 지역에 합작법인 형태로 ‘웨이퍼테크(WaferTech)’라는 파운드리를 운영한 적이 있다. 당시 TSMC는 57%의 지분을 보유한 최대주주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웨이퍼테크는 실패했다. 팹의 가격 경쟁력이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간 TSMC 창업자 장중머우는 “보조금이 일종의 모르핀”이라고 비판해왔는데 여기에는 웨이퍼테크의 교훈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제 칩은 국가전략자산이 됐다. 미국은 중국 견제가 오로지 국가 안보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미국의 각종 조치들이 자국의 경제적 이익과 긴밀히 연관돼 있음을 모른다면 바보다. 인텔 등 미국 기업들은 아마 보조금 정책의 각종 독소 조항을 비껴갈 구멍을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 기업들로서는 TSMC의 호들갑을 참조해 한국을 반도체의 메카로 더 튼튼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러고 보면 또 정치가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