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의병(義兵) 리더십과 과학기술 강국

과학기술 퍼스트 무버 도약해야
국가생존·성장·자주국방 등 가능
이름도 없이 나라 살린 의병처럼
산학연 R&D서 모험정신 절실

고광본 선임기자(부국장)

1919년 3월 10일 광주광역시의 한 하천길. 장터로 향하는 수많은 민중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목놓아 외친다. 이때 일본 헌병대가 칼을 휘둘러 광주 수피아여고생인 윤형숙의 팔을 잘라버린다. 윤형숙은 순간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죽을 힘을 다해 만세를 부른다. 100여 년 전 3·1 항쟁의 한 단면이다.


우리 민족은 당시 수개월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전국적으로 독립 항쟁을 펼쳤다.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약 200만 명이 참여해 7509명이 숨지고 1만 5850명이 다치고 4만 5306명이 체포됐다. 3·1 항쟁은 중국·연해주·일본·미국 등으로 확산돼 해외에 대한독립 의지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태동시키고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 등 독립 투쟁의 불씨를 활활 피어오르게 했다.


자칫 간과하기 쉽지만 우리는 일제강점기로 인해 남북으로 갈라져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했고 지금도 분단 체제로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다. 한국전쟁에서는 남북한 군인과 유엔군·중공군의 사상자가 총 250만 명이 넘었고 민간인 사상자도 그에 못지않게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북 이산가족도 약 1000만 명이나 생겼다. 그런데도 ‘식민지 근대화론’에 빠진 한 목사 부부가 3·1절에 일장기를 게양한 것도 모자라 항의하는 주민들을 경찰에 수사 의뢰하는 게 오늘날의 참담한 현실이다. 정부는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에 대해 일본 전범 기업이 내야 할 배상금의 재원을 국내 기업의 기부금으로 마련하기로 했다. 수많은 순국선열과 피해 영령들이 보면 그야말로 통곡할 일이다.


우리 민족은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의병(義兵)이 분연히 일어난 역사를 갖고 있다. 고려시대 몽골이 쳐들어왔을 때나 조선시대 임진왜란, 구한말·일제강점기 때도 그랬다. 의병 출신들은 3·1 항쟁이나 독립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상상조차 힘들 정도의 폭압 상황에서 악에 맞서 의를 추구한 것이다. 우리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세계 10대 경제대국과 7대 군사강국으로 우뚝 서 신흥 선진국의 롤모델로 자리 잡은 것도 이런 불굴의 민족정신에 기인한다.


이는 각 분야에서 도전정신·모험정신을 통해 나라를 일으키려 했다는 점에서 의병의 독립 정신과 큰 틀에서 궤를 같이한다. 이 과정에서 선진국을 빨리 벤치마킹해 따라잡는 과학기술 패스트팔로(빠른 추격자) 전략도 주효했다. 미중 패권 전쟁의 승패도 첨단 과학기술 경쟁에 달렸다는 점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결국 경제 발전이나 자주국방을 위해서는 연구소와 대학·기업의 연구개발(R&D) 환경을 자율적·역동적으로 만드는 게 핵심 과제다. 과학기술의 고도화가 정치·관료 체제의 혁신, 규제 혁파, 노동시장·연금구조 개혁, 교육 혁명, 저출산 극복, 혁신 생태계 구축 못지않게 중요한 국가적 과제인 것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해야 산업의 핵심 인프라인 소재·부품·장비와 소프트웨어 파워, 국가전략기술인 인공지능(AI)·반도체·배터리·바이오헬스케어·우주·양자 등을 키울 수 있다. 기정학(技政學)의 급변 속에 퍼펙트 스톰(대형 복합위기)이 몰아치는 현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자유를 중시하는 윤석열 정부에서도 R&D 환경의 자율성 보장이 여전히 부족하다. 수십 개의 과학기술 정부출연 연구원들이 공공기관의 틀에 갇혀 연구와 조직 운영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본연의 연구에 집중하지 못한다. 대학은 15년째 등록금이 사실상 동결돼 투자 여력이 크게 부족하다. 기업의 경우에는 당장 돈 되는 연구에만 연연하는 실정이다.


우리는 중국·베트남·인도 등이 부상하면서 이제 퍼스트무버(선도자)로 도약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각 분야에서 나라를 살리는 의병 리더십이 더욱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얼굴도 이름도 없이 오직 의병이오. 불꽃으로 죽는 것은 두려우나 난 그리 선택했소.”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고애신이 유진초이에게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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