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 27~28일 실시된 체코 대통령 선거 결선에서 무소속의 정치 신인 페트르 파벨이 전직 총리인 안드레이 바비시 긍정당(ANO) 대표를 누르고 압승을 거두자 유럽의 정치 지도자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친러시아 성향인 밀로시 제만의 후임으로 9일 대통령직에 오를 파벨은 친서방 노선의 인물이다. 그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군사위원장 출신으로 우크라이나 지원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반(反)이민·반유럽을 주장하는 바비시가 아닌 파벨의 승리는 곧 러시아에 맞선 서방 가치 연대의 강화를 뜻한다.
체코의 대선 결과가 갖는 의미는 그뿐만이 아니다. 서방 매체들은 ‘체코의 트럼프’로 불려온 억만장자 포퓰리스트 바비시의 패배를 두고 지난 10여 년동안 글로벌 정치 지형을 뒤바꿔온 포퓰리즘의 쇠퇴를 보여주는 단적인 징후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는 “바비시의 패배는 전 세계적인 반포퓰리즘 기류의 일환”이라고 진단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도 “유럽 포퓰리즘이 멈출 수 없는 추세가 된 것을 우려하는 유럽 시민들이 파벨의 승리에 열광했다”고 전했다. 파벨은 선거 전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머지않아 포퓰리즘은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해 권력을 유지하는 포퓰리즘의 발현은 19세기 러시아의 급진적 농본주의 사상 ‘나로드니키’와 미국 인민당(People’s party)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수를 위한 정책, 다수의 참여와 지배를 주장하는 포퓰리즘은 얼핏 민주주의와 맥을 같이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포퓰리즘은 기득권을 상징하는 ‘엘리트’와 대중의 적대 구도, 상대를 ‘악마화’하는 선동 정치를 통해 사회 분열과 혐오를 조장하고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한다.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를 필두로 1940~1950년대 중남미에서 기승을 부린 포퓰리즘은 2008년 금융 위기 무렵부터 전 세계의 정치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확산으로 소외감을 느낀 대중의 위기의식이 경기 침체로 증폭되자 이들의 불안과 공포를 파고드는 포퓰리즘 정당이 속속 생겨났다. 2009년 이탈리아 오성운동, 2013년 독일 독일을위한대안(AfD), 2014년 스페인 포데모스 등이 대표적 사례다. 이어 과격한 소수 정당이던 프랑스 국민전선과 그리스 시리자, 영국 독립당(UKIP) 등이 지지 기반을 넓혀갔다.
특히 2016년은 포퓰리즘 급부상의 분기점이 된 해다. 영국에서는 나이절 패라지가 이끈 UKIP와 보리스 존슨 등 보수당 강경파의 선동으로 6월 23일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가 결정됐다. 미국에서는 11월 8일 대선에서 반이민과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뒤로 오스트리아·체코에서 극우 포퓰리스트가 정권을 장악했고 극우 성향의 마린 르펜이 이끄는 프랑스 국민전선은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2018년 이탈리아에서는 서유럽 최초의 포퓰리즘 연정이 탄생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포퓰리즘의 기세가 예전 같지 않다. 2020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한 데 이어 지난해 중간선거에서는 트럼프가 공개 지지한 공화당 후보들이 줄줄이 낙마했다. 지난해 슬로베니아 총선에서는 극우 포퓰리스트 야네스 얀샤가 이끄는 슬로베니아민주당이 패배했다. 2016년 국민투표 당시 영국인들은 100명 중 52명꼴로 브렉시트를 지지했지만 올해 2월 유고브 여론조사에서는 ‘브렉시트가 잘못이었다’는 응답이 53%에 달했다.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는 최근 칼럼에서 포퓰리즘이 선천적으로 “짧은 반감기”를 가졌다며 “포퓰리즘은 6년 전에 승승장구했지만 그 뒤로 벽에 부딪쳤다”고 진단했다. 반감기 없이 반세기 넘게 포퓰리즘에 빠져 있던 아르헨티나에서도 올 10월 29일 대선을 앞두고 페론주의를 표방하는 집권 연합 ‘모두의전선’의 인기가 바닥이다. 블룸버그통신은 “모두의전선이 최악의 결과를 맞을 것”이라며 “페론주의가 급격한, 아마도 영원한 쇠락에 빠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포퓰리즘이 역풍을 맞고 있는 요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포퓰리즘 정권이 초래한 혹독한 대가의 경험치가 누적되며 유권자들의 경계감이 커졌다. 2020년 1월 31일 유럽연합(EU)을 떠난 영국은 이후 3년간 교역과 투자 감소에 따른 경제 위축으로 올해 주요 7개국(G7) 중 유일하게 마이너스 성장이 예상된다. 민간 싱크탱크 CER은 브렉시트의 여파로 지난해 상반기까지 영국의 국내총생산(GDP)이 5.5%, 투자와 무역은 각각 11%, 7%씩 감소했다고 분석했다. 우고 차베스, 니콜라스 마두로로 이어진 20여 년간의 좌파 포퓰리즘 정권 아래 경제가 파탄 난 베네수엘라의 사례는 말할 것도 없다. 독일의 킬세계경제연구소는 1900년부터 2018년까지 주요 50개 포퓰리즘 정권에 대한 경제적 영향 분석에서 포퓰리스트 집권 15년 뒤 1인당 GDP가 포퓰리스트가 집권하지 않았을 경우보다 평균 10%포인트 이상 위축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해 집권에 성공한 포퓰리스트가 정책적 한계를 노출하며 단명을 초래하기도 한다. 지난해 영국에서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겠다며 대규모 감세 등 어설픈 재정 포퓰리즘을 동원한 영국 보수당의 리즈 트러스 총리가 45일 만에 사퇴하는 굴욕을 당했다. 워싱턴포스트(WP)의 칼럼니스트 파리드 자카리아는 “기존 질서와 제도를 비판하고 엘리트 지배층을 공격하는 포퓰리즘은 야당에 유리하다”며 “이들이 집권당이 되면 포퓰리스트 정책의 한계가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지난 수년 동안 포퓰리즘 확산을 막는 강력한 방어제 역할을 한 것은 팬데믹 위기와 우크라이나 전쟁이었다. 전례 없는 위기는 안정된 리더십에 힘을 실어주기 마련이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팬데믹이라는 커다란 위기 앞에 사람들이 기존 제도를 선호하게 됐다”면서 “자유주의와 권위주의의 대결이 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권위주의 속성을 갖는 포퓰리즘에 대해 부정적 여론을 고조시킨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포퓰리즘이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섣부르다. 지난해 9월 스웨덴 총선에서는 나치즘에 기반한 스웨덴민주당이 사민당에 이은 제2당으로 도약해 우파 연합 승리를 이끌었다. 연립정부 구성에서는 배제됐지만 사회민주주의의 원조 격인 스웨덴의 정치 지형 변화에 국제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같은 달 이탈리아 총선에서는 극우 성향의 ‘이탈리아형제들’이 이끄는 우파 연합이 승리해 당 대표인 조르자 멜로니가 총리로 취임했다.
대중의 경계감이 커지자 종래의 과격한 면모를 숨기고 주류 정치로 더 교묘하고 깊숙하게 파고드는 포퓰리즘의 ‘진화’도 눈에 띈다. EU 탈퇴를 강력히 주장했던 프랑스의 르펜이 선거 패배 후 EU 개혁으로 노선을 수정해 지지 기반을 넓혔듯이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EU에 협조하는 태도로 ‘여자 무솔리니’의 이미지를 지우려 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와 경기 악화로 난민 급증에 따른 피로감, 실업난 등 현실 문제에 대중의 불만이 쌓이면 포퓰리스트들은 언제든 발톱을 드러낼 수 있다.
많은 기성 정치인들이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포퓰리즘 정책에 손을 뻗기도 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학자금 대출 탕감 등 선거를 의식한 ‘돈 풀기’ 정책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30조 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안과 양곡관리법 등은 대표적인 포퓰리즘 정책이다. 윤석열 정부도 ‘병사 월급 200만 원’ 공약 등 포퓰리즘 정책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치학자인 서병훈 숭실대 명예교수는 “포퓰리즘이 퇴조한다는 시각은 외국인 혐오 위주로 접근하기 때문”이라며 “깊은 생각을 하는 삶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시대가 흘러가고 있어 포퓰리즘은 교묘하게 확산돼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 뉴스쿨의 니나 후르셰바 국제학 교수는 한 기고문에서 “포퓰리스트의 최대 이점은 그들과 유권자의 거래가 유동적이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의 지지자들이 새로운 서사의 희생양이 되거나 새로운 대의명분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포퓰리스트는 손쉽게 입장을 뒤집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들의 모순을 지적하는 미디어는 ‘가짜 뉴스’로 매도된다. 미국에서 벌써부터 과도한 우크라이나 지원 비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슬로건이 내년 대선에서 다시 힘을 얻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김 교수는 “포퓰리즘은 사회·경제적 문제 해결에서 기존 정치권이 드러낸 무능과 정보사회 진전에 따른 정치적 직거래주의로 인해 확산된다”면서 “정치적 무능에 대한 대중의 실망은 언제든 포퓰리즘을 소환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렇게 등장한 포퓰리스트 정권이 다시 정책적 한계와 무능을 드러내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도 한시적일 뿐이다. 김 교수의 표현대로 포퓰리즘은 쉽게 잦아들지 않는다.
하버드대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에 따르면 민주주의 기반이 탄탄한 사회에서도 극단적인 포퓰리스트는 등장하게 마련이다. 문제는 이들의 등장이 아니라 눈앞의 집권을 위해 이들과 손을 잡아 주류 정치로 끌어들이는 정당과 기성 정치인들이다. 그렇게 포퓰리스트가 주류 정치로 편입돼 권력을 잡는 순간 “민주주의 제도를 미묘하고 점진적으로, 그리고 심지어 합법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죽인다”고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경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