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산업계의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기존보다 하향 조정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업종별 목표치 조정에 들어간 것으로 파악됐다. 탄소중립기본계획 수립 법정 기한(이달 25일)이 2주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석유화학·정유·시멘트·철강 업종 등에서 온실가스 감축량을 조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고 정부도 이를 고려해 의견을 조율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산업계의 목표치가 내려가면 에너지·수송·건물 등에서 온실가스 배출량을 더 줄여야 해 분야별로 치열한 키 맞추기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11일 서울경제 취재를 종합하면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해 말 2050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등에 ‘2030년까지 산업 부문의 온실가스 감축률 14.5%를 맞추기가 쉽지 않다’는 취지의 의견을 냈다. 탄녹위와 환경부 등은 이를 바탕으로 산업 부문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를 어떻게 설정할지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업종에 대해서는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목표가 조정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전해졌다.
산업계 "버겁다" 요구에 귀 열어
석유화학의 경우 원유나프타를 바이오나프타로 일부 전환해 탄소 배출량을 줄일 계획이었지만 관련 기술의 상용화가 늦어지면서 목표 조정이 불가피해졌다. 정부도 이런 사정을 외면하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정부는 2021년 산업 부문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2억 6050만 톤에서 2030년 2억 2260만 톤으로 14.5%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우리나라의 전체 온실가스 배출분을 40%로 감축한다는 NDC의 일환이었다. 산업계는 온실가스 배출 비중이 35.8%(2018년 기준)로 에너지(37.1%) 다음으로 높다.
문제는 산업계만 탄소 감축 목표를 낮춰줄 경우 파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기존의 NDC 감축 목표치를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 논박이 계속되고 있다”며 “에너지·수송 등 다른 분야의 기업도 반발해 자칫 탄소중립기본계획 수립이 법정 기한을 넘길 수 있다”고 말했다.
석유화학 분야에서 주요 온실가스 감축 수단으로 꼽히는 것은 ‘바이오나프타 전환’이다. 원유에서 추출하는 나프타 대신 바이오나프타 투입량을 늘리는 쪽으로 공정을 개편하면 석유화학 회사들의 온실가스 저감에 큰 도움이 된다. 실제 정부는 ‘2030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2021년 발표하면서 바이오나프타 일부 전환, 친환경 연료 활용 등을 바탕으로 석유화학 분야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4690만 톤에서 2030년 3740만 톤으로 20.2% 줄인다는 목표를 내놓았다. NDC에서는 산업 부문의 2030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3790만 톤 줄이겠다고 밝힌 바 있는데 이 중 석유화학의 기여분은 25%나 된다. 석유화학이 산업계 온실가스 감축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하지만 최근 정부는 산업 부문의 NDC를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바이오나프타 전환이 만만치 않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이오나프타 전환에 적용하기로 했던 기술의 상용화가 연거푸 밀린 탓이다.
바이오나프타 전환 지연되며 차질
9조 들인 '샤힌 프로젝트'도 걸림돌
바이오나프타의 주요 원료로 쓰이는 콩의 수급도 문제점으로 꼽혔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창의융합대학장은 10일 “2030년 NDC 기준으로 우리나라 석유화학 회사들이 필요로 하는 바이오나프타의 양이 현재 전 세계 콩의 공급량보다 많아 실현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있다”며 “식용유 등 식량 부문에서 쓰이는 콩을 바이오 생산용으로 가져와야 돼 세계 곡물가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최근 에쓰오일이 기공식을 연 ‘샤힌 프로젝트’ 역시 석유화학 분야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에 장애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샤힌 프로젝트는 울산 에쓰오일 온산국가산업단지에 9조 원을 투입해 첨단 석유화학 시설을 짓는 프로젝트인데 이로 인해 국내 석유화학 분야 탄소 배출량이 연 2000만 톤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처럼 주요 감축 대상 업종에서 다양한 문제가 불거지자 정부도 산업 분야의 NDC를 내려 잡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시멘트 사정도 여의치 않다. 정부는 연료로 주로 쓰이는 유연탄 등을 폐플라스틱 등으로 대체해 온실가스 배출량을 12% 줄인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플라스틱 재활용이 이미 활발해 폐플라스틱을 구하기 쉽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칫 폐플라스틱을 해외에서 수입해야 하는 상황까지 빚어질 판이란 얘기가 업계에서 나왔다.
심지어 탄소 배출이 가장 많은 철강의 경우 수소환원제철 기술이 2030년까지 상용화되기 어려워 2030년 NDC에서는 사실상 배제됐다. 유 교수는 “철강 측의 경우 2030년까지의 탄소 감축 목표치가 2.3%인데 이는 공정 효율화 등을 통해 충분히 이행 가능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정부에서는 산업계 NDC뿐 아니라 에너지 분야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까지 조정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에너지 부문은 2018년 2억 6960만 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해 국내에서 가장 많은 탄소가 나오는 분야다. 다만 정부가 전체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인 40%를 포기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국제사회와의 약속인 데다 방향 자체를 거스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40% 감축 목표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에너지·산업·수송·농식품 등 각 분야에서 목표치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최적의 솔루션 도출이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세종 관가의 한 관계자는 “탄소 감축 정책이 분야별 목표치 조정으로 귀결되는 상황이라 탄소중립기본계획 제출 역시 법정 기한을 넘길 게 거의 확실한 것 같다”고 말했다.
"여론 충분히 반영될지 불투명" 지적
관련 법에 따르면 정부는 이달 25일까지 중장기 감축 목표 달성을 위해 20년을 기본 기간으로 두는 탄소중립기본계획을 세워야 한다. 탄소중립기본계획에는 온실가스 감축 등 10개 부문별 감축 목표와 연도별 감축 경로, 이행계획 등이 담긴다. 그러나 정부 내 논의가 길어지면서 탄소중립기본계획 공청회는 제출 법정 기한을 3일 앞둔 22일에나 열린다. 이 때문에 탄소중립기본계획이 시민사회의 의견 수렴을 충분히 반영할지가 불투명하다는 지적이 우세하다. 정부는 공청회 전후로 탄소중립기본계획 초안을 발표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