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영화가 극장가에서 보이지 않는다. 영화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클래식’ 등 로맨스 영화가 한국 영화의 한 축을 이루던 시대는 분명 있었다. 반면 ‘환승연애’, ‘체인지 데이즈’, ‘나는 솔로’ 등 지난해부터 이어진 연애 예능 대세론은 여전히 건재하다. 연애 예능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채널A ‘하트시그널’은 최근 시즌 4 제작을 시작했고 티빙 ‘환승연애’와 넷플릭스 ‘솔로지옥’도 시즌 3 제작을 확정 지었다.
영화와 예능, 다 같은 사랑 이야기인데 무엇이 다를까. 서울경제스타 인턴기자들이 직접 그들만의 시각으로 대화를 나눠봤다.
*참여자 : 박주원 인턴기자, 조은빛 인턴기자
[주원] 요즘 한국 영화 중에서 로맨스 영화는 거의 못 본 것 같다. 최근에 본 작품이 있나.
[은빛] 실제 보진 않았지만 여진구, 조이현 주연의 ‘동감’(서은영 감독)이 기억난다. 관람한 작품 중 가장 최근작은 독립영화 ‘그 겨울, 나는’(오성호 감독)이다. 이마저도 사랑 이야기라기보다는 연애를 이어갈 수 없는 현실 속 주인공 청년의 아픔을 조명한 듯하다. 한국 영화에서 정통 멜로드라마 장르를 본 지가 정말 오래됐다. 최근 ‘환승연애’, ‘나는 solo’ 등 주변에서 연애 예능 인기를 체감했던 걸 떠올리면 의아한 일이다.
[주원] 로맨스 영화의 흥행 성적이 최근에 부진했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발표한 ‘2022 한국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를 살펴봤다. 2022년 전체 영화 박스오피스 순위(매출액 기준)에 이름을 올린 20개의 작품 중 '헤어질 결심'(17위) 단 한 작품만이 로맨스 영화였다. ‘헤어질 결심’이 유명 감독의 작품이고 칸 영화제 수상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단순히 로맨스 장르로서 흥행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은빛] 2020년에는 흥행 10위권 안에 로맨스 영화가 아예 없었다. 2021년에는 ‘연애 빠진 로맨스’, 2022년에는 ‘헤어질 결심’ 하나씩 각각 9위로 겨우 턱걸이를 했다. 최근에 액션이나 범죄·스릴러 장르가 유행한다는 경향을 감안해도 묘한 현상이다. 10년 전에는 이 정도가 아니었다. ‘시라노: 연애조작단’ (2010년-9위), ‘오싹한 연애’ (2011년-8위), ‘늑대소년’ (2012년-3위), ‘내 아내의 모든 것’ (2012년-6위), ‘건축학개론’ (2012년-8위) 등 로맨스 영화가 확실히 인기 있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극장 산업이 위축되자마자 로맨스 장르가 가장 먼저 자취를 감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주원] 이런 생각도 해본다. 기술력이 좋아지면서 지금까진 잘 시도하지 못했던 큰 규모의 영화도 만들 수 있게 됐다. 블록버스터, 액션 위주의 대작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졌고 ‘범죄도시2’ 처럼 천만 영화도 나왔다. 스펙터클한 미장센과 웅장한 사운드는 오직 극장에서만 온전히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 반면 로맨스 영화가 극장 관객에게 선택받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은빛] 개인적으로는 시대의 수요라는 측면에 집중했었다. 비슷한데 조금 다른 관점이다. 이제 사랑만으로 극 전체를 구성해가는 이야기가 관객의 마음을 건드리기 어려운 시대라는 생각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근원적이라서 이유가 없다. 전통적으로는 사랑이 그 동기를 설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스토리 설계에 있어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감정 자체로 욕망이 되는 근본 동기 중 하나였다는 말이다.
[은빛] 반면 과거보다 복잡·다원화한 지금의 시대에서 사랑이라는 정서는 절대적인 공감을 얻기 힘들어졌다. 1인 가구의 증가, 경제 활동 방식의 다양화 등으로 획일적이던 사회 양상이 흐려지는 지금이다. 전보다 더 다양한 욕망이 존중받고 구성원 각자가 지닌 조건과 처지도 복잡해졌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이유가 뚜렷하지 않은 맹목적 사랑은 낭만으로만 인식되긴 힘들다. 현대 사회에서 사랑이란, 창작자 시점에서 더욱 치밀하게 설계해야 하는 감정으로 자리한다.
[주원] 흥미로운 해석이다. 감성을 파괴하는 것 같지만 OTT의 등장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 같다. 이제는 극장에 가지 않아도 누구나 내 손안에서 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 사람들은 극장에서 보든, 집에서 보든 별 상관이 없는 로맨스 영화를 관람하러 굳이 극장에 가지 않는다. 이런 경향은 코로나19 사태로 극장 티켓값이 오르면서 더 가속화하기도 했다고 본다.
[은빛] 영화 보기 전 ‘극장에서 보기에 돈 아깝지 않은지’를 판단하는 경향도 뚜렷해졌다. 또한 이에 대처하는 스크린 로맨스 영화의 어법이 달라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최근에 흥행한 두 로맨스 영화 모두, 정통 멜로드라마의 장르적 어법을 따르지 않는다. ‘헤어질 결심’은 멜로-로맨스 장르로 분류됐어도 추리물의 특징이나 스릴러적 요소를 곁들인 장르의 혼합이 돋보였던 작품이다. ‘연애 빠진 로맨스’는 줄거리 소개에서부터 사랑의 시작에는 낭만이 없음을 내세운다. 영화의 티저 예고편에는 ‘연애는 그만’이라는 문구가 강조되고, 극 중 자영(전종서)은 “이제 더 이상 사랑 같은 고난이도 감정 노동을 안 하겠다”라는 대사를 뱉는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변주를 준 두 작품도 빠르게 OTT 서비스에 등록됐다. ‘헤어질 결심’은 개봉 4개월 만에, ‘연애 빠진 로맨스’는 개봉 한 달 만에 OTT에서 접할 수 있었다.
[은빛] 한편 예능계를 살펴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적은 제작비로 다량 제작이 가능한 연애 예능 프로그램이 높은 시청률과 화제성으로도 이어지면서 제작사 입장에서는 효도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평소 연애 예능을 즐겨보지 않는 편이라 인기 요인이 궁금했다.
[주원] 웬만한 연애 예능을 다 챙겨 보는 사람으로서, 딱 핵심만 보여준다는 점이 재밌는 것 같다. 원래 “썸 탈 때가 제일 재밌고 설렌다”라는 말도 있지 않나. 연애 예능은 사귀게 되는 과정이 중심이고 러브라인이 이루어지면 끝난다. 부가적인 이야기가 함께 진행되는 영화랑은 다르다. 극한의 효율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기에 딱인 것 같다. ‘과연 누가 누구를 선택할까’, ‘최종 커플은 누가 될까’라는 궁금증과 출연자들 간의 러브라인을 추리하는 재미도 인기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은빛] 핵심만 짚어준다는 말에서 예능 프로그램의 또 다른 특징이 떠오른다. 대부분의 연애 예능에서는 출연자들의 외모와 재력, 학력 혹은 직업과 같은 조건이 강조된다. 정동을 느끼고자 하는 관객이 아니라면 재미를 추구하는 시청자의 입장에서 이는 핵심 정보다. 방송은 핵심을 맨 첫 번째로 꺼내고 출연자 간 탐색을 이어 간다. 지극히도 두괄식이다. 재미가 없을 수 없다. 이를 아예 전면으로 활용한 프로그램도 있었다. 디즈니 플러스 오리지널 예능 ‘핑크 라이’는 출연자들이 직업이나 나이, 가정 환경 등을 속이고 등장한다는 콘셉트로 재미 요소를 설계했다.
[주원] 출연자가 일반인이라는 점도 몰입을 극대화하는 요소인 것 같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영화 속 등장인물은 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배우다. 반면 연애 예능에는 일반인이 출연한다. 대중은 일반인이 출연하는 예능에 더욱 몰입하기 쉽다. 마치 영화감독이 일부러 알려지지 않은 신인배우를 캐스팅해서 관객이 작품에 더욱 몰입하도록 만드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은빛] 연애 예능 속 영상 문법에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관음증적 욕구를 합법적으로 해소시켜주는 면이 있다. 출연자들이 숙소에서 생활하거나 데이트 나가는 장면을 보여줄 때, 이를 바라보는 관찰자를 따로 두어 중계를 전하는 형식이 그렇다. 관찰자인 패널들이 출연자들의 행동을 분석하고 소감을 말한다. 또한 모든 연애 예능에는 출연자의 속내를 털어놓는 인터뷰를 삽입한다. 출연자들의 행동에 뒤이어 곧바로 출연자들이 그 행동을 했던 내막이나 계기, 숨겼던 마음을 이어 설명하는 식이다.
이러한 방식이 연예 예능의 몰입을 극대화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시청자들이 공감할 대상이 표면에 배치되면서 예능과 시청자 간 거리가 가까워진다. 영화와 관객과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다.
[주원] 연애 예능은 물리적으로도 극장보다 접근이 간편하다. 영화에 비해 예능은 진입장벽이 낮다. 자신이 굳이 찾아보지 않더라도 TV 채널을 돌리다가 볼 수 있고, 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끌려 볼 수도 있다. 영화는 극장에 직접 가서 봐야 하기 때문에 자기 의지가 필요하다. 예능에 비해 영화의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은빛] 영화는 호흡이 길다. 설명도 붙지 않는다. 영화는 설명적일수록 대개가 욕먹는 장르다. 상징을 통한 메타포나 연출적인 여러 장치들이 영화를 보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라면, 그 장치의 사유와 분석이 오롯이 관객의 숙제로 남는다. 영화 속 인물의 내면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이 필요하다. 반면 연예 예능은 관찰자 시점으로 패널들이 해석이나 상식적인 반응까지 제시해 주지 않나. 액션-리액션의 구성이 몹시 즉각적이다. 편집이 아니라면 알기 힘든 모든 내용이 분명한 자막으로 전달된다. 정리하자면 연애 예능은 영화보다 간편하다.
[주원] 최근에 영화 ‘바빌론’(데이미언 셔젤 감독)을 인상 깊게 봐서 그런지 이런 예시를 들고 싶다. 유성영화의 등장으로 무성영화가 사라졌듯이 시대가 변하면 변화는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다. 극장에서 로맨스 영화가 적어지고 있는 것도 하나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로맨스 영화의 종말을 선언하는 건 아니다. 극장용 영화로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거지. 그래서 경쟁력을 높이는 방법 중 하나는 좀 더 진입장벽이 낮은 OTT를 매체로 활용하는 것이다. 성공적인 예시로, 클리셰 가득한 청춘 로맨스물인 넷플릭스 영화 ‘20세기 소녀’(방우리 감독)는 흥행에 성공했다. 스토리가 좋다는 전제하에 극장보다 접근성이 좋은 매체를 선택한다면 로맨스 영화의 경쟁력이 높아지지 않을까.
[은빛] 변영주 감독이 쓴 저서 ‘영화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다’를 보면 “영화는 사회에 종속된 대중 예술”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간 한국 로맨스 영화가 부진하고 있는 것은 지금 이 시대의 감성이 낭만과 멀어져 가는 현실이겠거니 추측해왔다. 하지만 이번 대화를 위해 직접 연예 예능을 시청해보니, 인기 있는 연애 예능에서는 저마다의 서사를 가진 출연자들 간 관계성이 돋보였다. 결국 공감이라는 핵심에 닿을 수 있었다. 현실적인 출연진들의 감정을 따라가며 울고 웃는 마음. 몰입과 동화를 통한 공감이 그리웠던 대중의 욕구가 연애 예능 전성기로 이어졌다. 시대 정서를 관통하여 울림을 줄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고민해 볼 기회다.
[주원] 외국영화이긴 하지만 최근 ‘상견니’와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가 크게 흥행했다. 이는 로맨스에 대한 한국 관객의 수요가 아직 존재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감정 중 하나는 사랑 아닌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다루는 로맨스 영화가 변화 속에서도 계속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