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명품 애호가는 시계, 여행자는 알프스에 관심을 갖는다. 다른 이유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자기 선택권을 위해 스위스를 찾는다. 하지만 정작 스위스인에게 안락사는 다양한 죽음의 옵션 중 하나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요양원에 있든 집에 있든 삶을 존엄하게 지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서울 종로 5가의 한 카페에서 서울경제와 만난 ‘각자도사(各自圖死) 사회’의 저자 송병기 작가는 “죽음을 바라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불안정한 사회에서 죽음은 언제나 존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존엄한 사회 안에서 산다면 삶의 마감도 존엄하게 할 수 있습니다. 스위스에서 배울 점이 바로 여기에 있죠.”
의료인류학자인 송 작가는 죽음을 좇는 사람이다. 파리대학교병원과 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에서 생애 말기 돌봄과 관련한 연구를 진행했고, 프랑스와 모로코, 일본의 요양원 등을 돌아다니며 현장 연구를 진행했다.
그가 볼 때 한국 노인들이 원하는 죽음의 방식은 ‘깔끔한 죽음’이다. 남에게 더러운 꼴 보이지 않는 것, 당사자나 가족, 요양 보조원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고 삶을 마감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송 작가는 “한국 노인들의 삶의 끝자락은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인도 고통스럽게 만든다”며 “깔끔하게 죽자는 말은 삶의 터전이 얼마나 불안한 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지적했다.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돌봄이 오롯이 개인의 문제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환자나 가족은 병원비는 물론, 간병인 비용까지 자체 부담해야 한다. 가장이 아프다면 가족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린다. 요양원이나 병원이 많은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 거주한다면 그나마 다행. 의사가 부족한 지방의 노인들은 길거리로 내팽개쳐진다. 요양원에 들어간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그는 “일반 요양 시설에 들어간다는 것은 정해진 시간표를 엄수하고 획일적인 식사를 하는 군대와 다르지 않다”며 “신체의 자유와 섬세한 진료를 받으며 존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굉장히 비싼 요양 시설에 들어가는 방법 뿐"이라고 덧붙였다. 우리 사회가 삶의 불평등을 초래하는 거대한 돌봄 피라미드 위에 놓여있다는 의미다.
삶의 불평등이 불평등한 죽음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교수나 의사, 판·검사보다 건설업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죽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직업 자체가 산업 재해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고독사나 무연고사도 빈곤과 무관하지 않다. 송 작가는 “사회 안전망이 결핍된 사회에서 죽음은 언제나 갑자기 들이닥친다”며 “이런 점에서 죽음은 아주 불평등하게 오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송 작가는 돌봄과 죽음의 문제를 정치의 영역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1960~70년대 인구가 중요했던 이유는 안보와 북한과의 체제 우위 때문이었고, 2003년 이후 등장한 ‘인구 위기론’은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정치적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이 과정에서 경제력이 약한 노인은 국가 재정을 갉아먹는 존재가 됐다. 그는 “인구위기론은 노인을 환자로 만들고 시설로 떠넘기는 과정”이라며 “경제 활동이 중요하게 되면서 돌볼 사람이 없는 노인들은 시설을 전전할 수 밖에 없게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송 작가에게 죽음은 공동체의 존립을 뒤흔드는 문제다. 간병을 의료보험으로 통합시키는 간병 급여화, 전국에 100여 개 밖에 안되는 호스피스의 확충, 왕진 시스템의 구축과 수가 체계 조정, 치료 중심의 의료 교육에 죽음에 대한 연구 추가 등이 단기적 처방이 시급한 이유다.
이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장기적인 방향 설정을 위한 논의도 절실하다. 송 작가는 “근본적으로 복지란 무엇인가, 임금 노동 중심의 복지 체계가 과연 지속 가능한 지 등에 대한 재검토가 이뤄져야 한다”며 “의료적 처치로 계속 살아가는 것이 의미가 있는 지 점검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삶에서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안락하게 살면 존엄하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송 작가는 “우리 방식의 존엄한 삶과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하다”며 “우리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 가면서 죽음이라는 과정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