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기업인 인텔과 마이크론에 수조 원대 보조금을 지급하는 법안이 한국 국회에서는 과연 통과나 될 수 있었을까요?” 최근 글로벌 반도체 업계의 뜨거운 현안인 미국의 반도체지원법 보조금 지원공고(NOFO·노포)와 관련해 워싱턴DC의 한 소식통은 이같이 반문했다. 국내 기업에 세제 혜택을 주는 반도체특별법조차 국회에 7개월째 계류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만약 해외 기업에 대규모 보조금을 주는 법안이 추진된다면 여론의 반발을 견딜 수 있었겠냐는 것이다. 이 소식통은 “미국에 뒤통수를 맞았다고 분노하기보다 미국 국내 정치를 이해하며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반도체 보조금에 초과이익 공유제와 같은 과도한 조건이 붙은 것은 미국의 현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가장 민감하게 주시하는 것 역시 ‘특혜 논란’이다. 릭 스콧 민주당 상원의원(플로리다주)이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징그럽게 기업에 혜택을 주는 법안”이라고 했을 정도로 여당 내부에서도 이 법안의 반대 여론은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반도체 공급망 재건’이라는 명분이 있어도 TSMC와 삼성전자 같은 천문학적 수익을 내는 글로벌 반도체 기업에 수조 원대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 이른바 ‘대기업 증세’를 지향해온 민주당 정부 입장에서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납세자의 돈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는 차기 대통령 선거의 표심을 좌우할 미국 정치권의 뜨거운 이슈기도 하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최근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후 수습 과정에서 “납세자들이 실패한 은행의 손실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는데 이는 2008년 금융위기 때의 막대한 구제금융이 여론의 거센 분노로 이어진 것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작은 정부’와 ‘적은 세금’을 지향하며 시작된 티파티 운동은 미국의 정치 지형을 흔들어 결국 도널드 트럼프라는 극우 후보의 당선으로까지 이어졌다. 더구나 올해 바이든 대통령은 나랏돈을 쓰는 문제인 연방정부 부채 한도 상향을 두고 공화당 강경파들과 일전을 준비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발표된 기형적인 반도체 보조금 조건은 미국이 갖고 있는 정치적 딜레마를 그대로 반영한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이를 ‘프랑스식 산업 정책’이라고 비꼬았는데 복지 정책인지 산업 정책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의미다. 스콧 스나이더 미국외교협회 한미정책국장은 “미국은 동맹국의 역량을 미국 경제 안에 통합시키려는 욕구와, 동맹국과의 긴장을 유발하는 미국우선주의 욕구 사이의 내부 모순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을 끌어들여 공급망을 세우겠다면서 기업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과도한 조건을 제시하고 전기차 패권을 쥐겠다면서 막상 북미 지역에서 생산된 전기차에만 세제 혜택을 주는 식의 오락가락 정책들이 줄줄이 발표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당장 내년이면 미국 대선이 치러지는 가운데 미국의 국내 정치가 해외 기업의 리스크로 부각되는 사례는 더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앞으로 관건은 이 같은 미국의 움직임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는 문제다. 한국산 전기차 차별 문제가 불거진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때처럼 분노하고 목소리만 높여봤자 상황 해결에는 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 이미 입증됐다. 워싱턴의 한 통상 전문가는 “반도체지원법도, IRA도 미국이 까다롭게 나오고 있으나 결국 이 법안들이 글로벌 기업 사이에서 흥행이 안 되면 가장 타격을 받는 것도 바이든 행정부”라면서 “동맹국인 한국 기업들의 이익이 궁극적으로 미국의 안보 전략에 부합하며 기업들에는 다른 선택도 있다는 논리로 미국을 집요하게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음 달 워싱턴DC에서 열릴 한미정상회담은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모순을 바로잡고 한국 기업들의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는 중요한 기회다. 윤석열 대통령이 창의적인 해법과 논리로 무장해 백악관을 찾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