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약 3500년 전 메소포타미아 문명. 농경사회를 이루던 고대인들은 보리와 밀이 썩은 물을 우연히 맛보게 됐다. 그런데 알 수 없는 힘이 샘솟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맥주가 탄생했다. 이후 맥주는 인류의 긴 생활사를 함께해오며 다양한 품목과 종류를 발전시켜왔다. 지금은 맥주 브랜드만 해도 2만여 가지가 넘는다.
이제는 맥주를 제대로 마시려면 따로 공부를 해야 할 정도다. ‘맥덕(맥주 덕후)’들은 맥주를 어떻게 마셔야 하는지, 어떤 음식과 먹어야 되는지 탐구하면서 술을 마신다. 그러나 이 과정은 지루하거나 따분하지 않다. 알고 먹는 만큼 더 맛있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알고 먹는 만큼 숨겨진 향을 더 세세하게 느낄 수 있다. 오비맥주가 운영하는 ‘비어마스터 클래스’에서 맥주 맛있게 마시는 법을 엿들어봤다.
맥주는 발효 방식에 따라 크게 에일과 라거로 나뉜다. IPA, 둔켈, 필스너 등 다양하지만 모두 이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현재 전세계 유통되는 맥주의 70~80%는 라거 계열이다. 하지만 약 300~4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라거보다는 에일이 훨씬 더 인기가 많았다. 에일은 묵직한 바디감과 함께 과일향, 꽃향 등의 깊은 풍미가 특징이다. 라거에 비해 알코올 도수도 높다. 반면 라거는 깔끔하고 청량한 느낌을 준다. 바디감이 가볍고 알코올 도수도 상대적으로 낮다.
에일은 상온에서 효모가 발효된다. 고대 문명인들이 우연히 곡물 썩은 물에서 술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덕분이었다. 그만큼 에일은 역사가 깊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상온에서 만들어져 부패하기 쉬웠던 것이다. 라거는 저온에서 발효돼 쉽게 상하지 않았다. 그렇게 라거는 냉장고의 발명과 더불어 전세계로 뻗어나갔다.
사연이야 어찌됐든 두 맥주의 경쟁(?) 덕분에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맛볼 수 있게 됐다.
중세 유럽에서는 수도원에서도 맥주를 만들었다. 수도사의 금식 기간 동안 영양분 공급을 위해 맥주를 양조하던 게 시초다. 맥주는 액체 빵의 다른 이름이다. 수도원은 이렇게 만든 맥주로 외부 손님을 접대하기도 하고 맥주로 얻은 수익금을 지역 사회에 기부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수도원 맥주로는 벨기에의 레페 브라운과 트리펠 카르멜리엇이 있다. 둘 다 에일 계열이다. 레페 브라운은 벨기에의 레페 수도원에서, 트리펠 카르멜리엇은 카르멜리엇 수도원에서 만들었다. 레페 수도원은 1240년부터 맥주를 양조하기 시작했지만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벨기에가 점령당하면서 파괴됐고 맥주 양조법도 소실했다. 하지만 1952년 다시 복원돼 맥주를 만들고 있다.
레페 브라운은 카라멜, 초콜릿, 자두향 등 달달함이 특징이다. 케이크와 초콜릿 등과 먹으면 달달함을 극대화할 수 있고 맥주의 맛도 좀 더 진하게 느낄 수 있다.
트리펠 카르멜리엇은 보리와 밀, 귀리 등 3가지 곡물을 모두 숙성시켜 만들었다. 바나나, 바닐라향이 부드러움이 특징이고 맥아인 몰트향도 함께 느낄 수 있다. 베리 종류의 과일과 스파이시한 샐러드 또는 해산물과 잘 어울린다.
밀 맥주는 맥주에 들어가는 곡물 중 밀의 비율이 50% 가까이 될 정도로 밀이 많이 들어간 맥주다. 맥주에 진심인 독일은 “맥아, 홉, 물외에 다른 어떤 재료도 맥주에 넣어서는 안 된다”는 맥주 순수령을 1516년 발표했다. 하지만 밀 맥주는 순수령의 위기에서도 살아남았다. 금지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결국 밀은 순수령의 예외 조항으로서 허용된다.
밀 맥주는 독일식 헤페바이젠·바이스비어와 벨기에식 위트비어, 미국식으로 나뉜다. 국내에서 쉽게 맛 볼 수 있는 밀 맥주로는 핸드앤몰트의 밀구름(독일식)과 호가든 위트비어(벨기에식)가 있다. 밀구름은 바나나향이 특징이고 호가든 위트비어는 오렌지향을 느낄 수 있다. 밀 맥주는 가벼우면서도 달콤한 향이 강조돼 매콤한 음식과 함께 먹으면 좋다. 매운 맛을 부드럽게 중화시켜준다.
미국식 밀 맥주로는 구스 아일랜드 312가 있다. 상큼하고 청량한 느낌을 줘 기름진 음식이나 해산물과 잘 어울린다.
라거는 약 1300년 전 독일의 바바리안 지역에서 처음 발견됐다. 하지만 라거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건 체코의 필젠 지역에서 필스너가 탄생하면서부터다. 필스너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맥주”하면 흑색 또는 적갈색을 떠올렸다.
그러나 필스너는 필젠 지역의 연수 덕분에 맑은 황금색을 띠었다. 때마침 유리병이 값싸게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주로 맥주의 맛과 향에만 관심을 갖던 사람들은 맥주의 색깔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맑은 황금색의 필스너가 주목을 받으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유사 필스너가 너무 많아지면서 맥주 회사는 필스너라는 단어에 ‘원조’라는 뜻의 ‘우르켈’이라는 이름을 따로 붙여야 할 정도였다.
유럽에서 큰 인기를 라거는 바다 건너 미국에까지 세력을 넓힌다. 18세기 미국으로 대거 건너간 유럽 이민자들 중에는 독일 출신의 양조가들도 있었다. 이들은 독일식 양조법을 적용하되 미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쌀과 옥수수 등도 맥주에 넣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미국식 라거(아메리칸 라이트 라거)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아메리칸 라이트 라거는 발효율이 높고 잔당감과 바디감이 적은 게 특징이다. 쌀과 옥수수는 맥주의 맛을 부드럽고 깔끔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이들은 안주 본연의 맛을 가장 잘 살려주는 맥주 중 하나다. 탄산의 청량감 덕분에 맵고 짠 음식과 특히 더 잘 맞다.
대표적으로는 버드와이저, 밀러, 카스가 있다. 카스는 짜고 기름진 음식이 많은 한국의 식문화에 따로 맞춰 개발된 맥주다. 오비맥주는 맥주의 맛이 도드라지지 않고 잔당감을 낮추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72시간의 콜드부르 과정을 거쳐 효모의 잔존물을 최소화하는 과정 등을 거친다. 삼겹살, 치킨, 찌개류와 잘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