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 '칩 제작' 40% 뚝…반도체 미래가 헛돈다 [biz-플러스]

반도체 설계 실전경험 3년 연속 '내리막'
제조 경험 학생수 29%↓
반도체 종류도 284개→170개 급감

램리서치매뉴팩춰링코리아 화성 공장에서 엔지니어가 방진복을 입고 반도체 장비를 조립하고 있다. 사진 제공=램리서치코리아

우리나라 반도체 전공 대학원생들의 칩 제작 실전 경험이 매년 급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책상에서 이론 교육을 받은 뒤 반도체를 설계해도 이를 막상 웨이퍼 위에서 실물로 구현해내지는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전 세계가 반도체 고급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이고 있지만 정작 우리나라 반도체 교육은 후진하고 있어 시스템반도체 분야의 경쟁력 격차가 벌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일 서울경제신문이 입수한 ‘반도체설계교육센터(IDEC) 석·박사 대학원 반도체 제작 지원 프로그램 현황’에 따르면 2019년 이후 제작 지원을 받은 학생 수와 반도체 프로젝트(종류) 수가 모두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IDEC는 1995년 산업통상자원부와 민간기업 등의 지원을 받아 설립된 기관이다.


실제 지원 수혜 학생 수는 2019년 1006명에 달했으나 지난해에는 710명으로 29.4% 줄었고 제작된 칩 종류도 같은 기간 283종(種)에서 170종으로 40% 넘게 급감했다. 1종당 제작되는 실물 반도체 칩의 개수는 100여 개인 것으로 알려졌다.


IDEC에서 운영하는 이 프로그램은 대학원생들이 수업이나 프로젝트 등을 통해 반도체를 설계한 뒤 IDEC가 국내외 반도체 팹(공장)을 연결해주면 여기서 시제품을 생산하는 방식이다. 한 장의 웨이퍼에서 여러 가지 제품을 찍어내기 때문에 멀티프로젝트웨이퍼(MPW)라고 부른다. 통상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업체에 발주해 칩을 제작하려면 최소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이 들기 때문에 이 같은 프로그램을 통하지 않고서는 학생들이 실전 경험을 쌓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지원 건수가 줄어든 것은 역설적으로 반도체 호황 탓이다. 파운드리 업황이 2019년 이후 호황기로 접어들면서 민간기업의 발주를 받아내기에도 물량이 부족해 학생 제작 지원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유재희 홍익대 교수는 “학생들의 칩 설계 능력을 배양할 지원 대책을 만들지 않으면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격차가 더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뒤로가는 반도체 인력 양성…국내 주요대학 실습 건수 지속 하락

“우리나라에서 잘나간다는 공대 졸업생을 신입 사원으로 뽑아놓아도 현장에 투입하려면 최소 2년의 현장 교육이 필요합니다.”


국내 반도체 기업의 한 임원은 최근 반도체 인력난에 대해 이같이 토로했다. 대학에서 현장 맞춤형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졸업생 수가 늘어나는 것과 상관없이 실전 인재의 부족 현상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석·박사 대학원 반도체 제작 지원 프로그램 현황을 보면 이 같은 ‘인력 미스매치’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나마 예비 고급 인력으로 분류되는 석·박사 과정 학생들조차 실전 경험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나타나서다.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칩을 실제로 만들어보는 경험은 실력을 키우는 데 필수 과정이다. 아무리 이론을 배워도 실제로 공장에서 칩을 찍어내 보면 제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전류 흐름 등에서 예상 밖의 오류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당연히 최대한 많은 실습을 거쳐야 설계 실력도 함께 늘어나는 구조다.


하지만 반도체 제작 지원을 받는 학교의 수는 매년 줄어들고 있다. 가령 최상위권 공과대로 분류되는 포항공대가 제작 지원을 받은 칩 프로젝트 건수는 지난해 단 1건에 그쳤다. 2015년 12건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것과 비교하면 감소율이 91%에 달한다.


다른 주요 공과대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KAIST의 실습 건수는 2015년 46건에서 17건으로 절반 이상 줄었고 경북대도 이 기간 지원이 17건에서 2건으로 감소했다. 고려대(46건→17건)와 서강대(12건→2건), 성균관대(17건→7건), 중앙대(9건→2건), 한양대(19건→17건), 충남대(11건→6건)도 일제히 줄었다. 그나마 학교 차원에서 반도체 계약학과 등 인재 양성에 힘을 쏟고 있는 연세대(13건→16건)만 지원 건수가 소폭 늘었다.


파운드리 호황 역설에 예산 부족 영향…실습 참여할 인재 풀 축소도 한몫

정부까지 나서 반도체 인력 양성을 외치는 와중에도 실습 건수가 줄어든 데는 업황과 예산 부족, 반도체 전공 학생 수 감소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우선 MPW 공정을 지원하는 국내 파운드리 업체가 코로나19 이후 초호황 시기 급증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MPW 서비스 제공 물량을 줄였다. 정부 예산 지원을 받는 IDEC가 민간 기업과 발주 경쟁을 하기도 사실상 어려웠다. 여기에 과거 MPW 서비스를 제공하던 키파운드리(옛 매그나칩반도체 비메모리 부문)가 매각 절차를 밟으며 지원 사업에서 라인을 철수한 것도 결정적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키파운드리에 발주를 맡겼던 한 대학교 연구팀은 아예 제작 경험을 쌓아보지도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반도체 인재 풀 한계로 인한 현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7년간 반도체 제작 지원을 받은 적 있는 65개 대학 중 매년 프로그램에 참여한 대학 개수는 24개에 불과했다. 그만큼 반도체 실무 경험을 지닌 인재를 꾸준히 키우는 학교 자체가 많지 않다는 뜻이다.


범진욱 서강대 전자공학과 교수는 “2014~2015년 반도체와 관련한 국책 과제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정부 지원이 빈약했다”며 “이러한 지원 부족이 7~8년이 지나 이 같은 결과를 낳은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 "반도체 설계 교육 수준 미흡…대책 마련해야"

전문가들은 이에 따라 한정된 자원을 집중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집중 연구개발(R&D) 센터 설립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앞서 정부는 석·박사급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해 반도체특성화대학원을 3곳 설립하기로 했는데 재원이 충분하지 않다면 역량을 분산하는 것보다 차라리 한 곳에 지원을 몰아주는 게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IDEC 모델을 벤치마킹한 대만은 연간 2000명 수준의 석·박사급 설계 인력을 배출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 계획안을 보면 대학원 1곳당 연간 30억 원을 지원한다고 하는데 이 정도로는 학생들이 마음껏 실습을 하기는 사실상 어렵다”며 “팹리스(설계) 단계부터 인력의 양과 질이 부족하면 파운드리와 후공정에서도 줄줄이 경쟁력이 밀리는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반도체 업계는 2031년 기준 약 5만 4000명의 인력 부족이 예상될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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