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형색색 거대한 밧줄이 나무처럼 수직으로 뻗어있다. 바닥에 밟히는 흙은 언제라도 다시 새싹을 틔울듯 촉촉하다. 태초의 거대한 자연과 같은 원시적인 모습의 실내 공간의 양쪽 벽에는 대지를 걷는 흑인 여성의 모습이 영상으로 등장한다. 영상은 빛에 반사돼 바닥에 놓인 커다란 수조의 물에도 비친다. 이 설치미술은 남아공 출신 블레베즈웨 시와니의 작품 ‘영혼강림(2022)’. 시와니는 선주민이 수세기간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균형을 이뤄 왔으나, 최근 이 균형이 깨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무너진 균형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는것이며 땅이 우리를 치유하는 힘을 선물로 내줬음을 깨닫는 일”이라며 작품을 설명한다.
아시아 최고 권위의 광주 비엔날레가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를 주제로 7일 개막했다. 지난 2021년에 열린 13회 행사는 코로나19로 크게 위축된 만큼, 올해는 사상 최장기간인 94일간의 행사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이를 위해 총 30개국, 79명의 작가가 300여 점의 작품을 내놨다.
이숙경 예술감독의 진두지휘 하에 펼쳐진 올해 행사는 ‘약자들의 연대의 장’이라 할 수 있다. 예술인들은 5·18 광주 항쟁을 세계 곳곳에서 펼쳐진 자유를 위한 운동으로 노골적이지 않게 표현한다. 가장 많은 작품이 걸린 ‘비엔날레 전시관’은 전체 전시관 중 유일하게 유료. 하지만 비엔날레를 즐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들러야 하는 핵심 공간이다. 이 곳에는 61명의 작가가 회화, 조형, 설치미술을 선보인다.
전시관은 5.18 역사를 향한 애도로 시작한다. 말레이시아 작가 팡록 술랍은, 커다란 천에 광주의 모습을 사진처럼 새긴 목판화 ‘광주 꽃피우다’를 선보였다. 판화에 등장한 꽃은 희생자를 상징한다. 알리자 니센바움은 항쟁 2년 후 설립된 광주 놀이패 ‘신명’과 협업한 회화 작품으로 광주의 시대정신을 표현한다. 특히 희생자와 가족을 위로하기 위한 마당극 ‘언젠가 봄날에’의 모습을 사진처럼 담아낸다.
이숙경 감독은 “약해 보이지만 강한 힘과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비엔날레”라며“광주의 정신과 예향을 통해 다른 곳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나는 불평등한 것들의 이야기를 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1~2 전시관을 지나 3전시관에 이르면 비엔날레는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억압받은 이들을 대변한다. 고이즈미 메이로의 영상물 ‘삶의 극장’은 일본인인 작가가 광주 고려인 마을의 현재와 과거를 추적하는 과정으로 비엔날레 정신을 반영한 대작이다. 고려인은 중앙아시아의 한국이주민. 작가는 광주의 고려인 공동체에 속한 청소년 15명과 가진 워크숍을 촬영하고, 한 쪽 코너 벽 전체를 활용해 관람객에게 이를 보여준다. 이날 방문한 관람객들은 작품 앞에서 한참이나 머물며 ‘소수민족’ 동포의 삶을 바라보고 사유했다.
관람객이 직접 만지고, 제작하는 참여 전시도 풍성하다. 세계적인 사운드 아티스트 타렉아투이는 4년간 광주 지역 현지 악기장, 예술가와 협업한 작품으로 매주 토요일 11시 ‘소리와 진동 워크숍’을 진행한다. 관객의 신체를 캔버스로 쓰는 ‘바디페인팅(김구림)'. 신체의 움직음을 커다란 원으로 표현하는 ‘바디스케이프 76-3(이건용)’도 어린이와 청소년 관객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작품이다.
비엔날레 본전시는 메인전시관 외 국립광주박물관,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 무각사, 예술공간의 집 등 광주 전역에서 즐길 수 있다. 국립광주박물관은 로비에서 김기라 작가의 ‘편집증으로서의 비밀정원’으로 시선을 장악한다. 이 곳에는 작가가 무작위로 수집한 도자기, 분재 등의 물건을 자유롭게 전시해 관념적으로 ‘동양적인 것’으로 분류되는 서구 중심주의적 태도와 습관을 표현한다. 도자 공예 장인 류젠화는 비엔날레전시관에 붉은색 작품을, 무각사에서는 흑색 도자 작품인 ‘숙고의 시간’을 선보인다. 도자기의 광택은 공간을 밝히고 동시에 관객의 얼굴과 사물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작가는 이를 통해 객체와 주체, 과거와 현재를 구분 짓는 경계를 허물고자 한다. 14회 광주 비엔날레는 4월 7일부터 7월 9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