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배전 투자 놓치면 블랙아웃 위기…"전기료 올려 실탄 쌓아야"

■한전 전력망 투자비 급증…반도체클러스터 전력수급 비상
한전, ㎾h당 33원 밑지고 팔아 올 최대 15조 적자 전망
전력망 노후화땐 수도권 산단 멈추고 원전·신재생도 차질
대만, 국가차원 발전설비 교체…韓기업은 각자도생 몰려


지난달 삼성전자(005930)가 경기도 용인에 300조 원을 투자해 세계 최대 규모의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를 만들기로 약속했다. 삼성의 천문학적 투자를 통해 반도체 클러스터가 완성되면 생산 유발 효과만 700조 원, 고용 유발 효과도 16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 같은 장밋빛 희망이 현실로 이뤄지려면 무엇보다 반도체 설비를 원활히 가동하기 위한 전력 공급이 필수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국가 전력망은 위기를 맞고 있다. 정부가 2030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달성을 위해 원전·재생에너지발전 비중을 높이면서 전력망도 함께 보강해야 하지만 정작 투자 주체인 한국전력은 적자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수도권과 가까운 거리에서 전력을 생산하는 석탄화력발전소들이 하나둘 가동을 멈추고 태양광 등 신재생발전으로 생산한 전력을 끌어와야 하는 상황에서 전력망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반도체 공장을 세워야 하는 최악의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9일 한전의 ‘2022~2026년 중장기 재무관리 계획’에 따르면 한전은 올해 송변전 설비에 2조 9034억 원, 배전 설비에 3조 6459억 원 등 총 6조 5493억 원의 투자를 계획했다. 이는 2021년 중장기 재무관리 계획에서 세운 2023년 송변전·배전 설비투자 목표치(6조 8868억 원) 대비 3375억 원이나 줄어든 수치다. 향후 5년간 총투자비 규모도 2021년 계획 당시 40조 8000억 원에서 지난해에는 40조 7000억 원으로 감소했다.


한전의 설비투자 규모가 줄어든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급등한 연료비를 전기료에 제때 반영하지 못하면서 재무 상태가 급격히 악화했기 때문이다. 실제 액화천연가스(LNG) 연료비 급등 여파로 지난해 한전의 전력 구입 단가는 2020년 대비 90.5% 올랐지만 판매 단가는 9.7% 증가하는 데 그쳤다. 지난해 한전은 전력을 ㎾h당 153.7원에 구매해 120.5원에 판매하면서 33.2원씩 밑졌다. 이렇게 누적된 영업적자는 지난해에만 32조 6034억 원에 달했고 올해도 전기료 조정이 없을 경우 최대 15조 원의 적자가 예상된다.


설상가상으로 연료비의 바로미터인 국제 유가까지 상승하고 있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지난달 배럴당 60달러대에 머물렀던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과 주요 산유국으로 이뤄진 ‘OPEC+’의 감산 여파로 이날 84.57달러까지 치솟았다. 이에 따라 올해 초 국제 에너지 가격 하락으로 안정세에 돌입했던 전력도매가격(SMP)도 급등할 가능성이 커졌다.


문제는 적자에 허덕이는 한전이 2036년까지 100조 원 넘는 전력망 투자 비용을 조달하려면 다시 채권 발행을 늘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한전채 발행이 급증할 경우 지난해 ‘레고랜드 사태’와 같은 채권시장 혼란이 재연될 수도 있다. 지난해 한전채 발행액은 37조 2000억 원으로 2년 새 12배 넘게 늘어난 상황이다. 전력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전력망 투자가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노후화로 전력 공급이 불안정해지고 대규모 정전이 발생할 가능성도 높아진다”며 “국가 미래를 위해서라도 전기료 인상의 필요성이 더 커진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더욱이 한전의 재무 부담으로 전력망 구축이 늦어지면 삼성전자의 용인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에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도 있다. 이소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연간 전력 소비량은 27TWh로 추산된다. 인근 삼성전자 반도체 평택 캠퍼스와 SK하이닉스(000660) 용인 캠퍼스가 완공되면 31.6TWh가 더해져 수도권 반도체 단지에서만 60TWh에 육박하는 전력이 소비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2021년 서울시의 연간 전력 소비량(47.3TWh)을 훌쩍 넘는 수치다.


이처럼 대규모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한 전력망 투자가 필수인 상황에서 NDC 달성을 위한 전력망 구축의 압박은 커지고 있다. 지금은 반도체 기업들이 수도권 공장과 가까운 당진화력발전소 등에서 전력을 공급받고 있지만 NDC 달성을 위해서는 화력발전 비중이 급격히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0차 전력 수급 계획에 따르면 2021년 34.3%였던 석탄발전 비중은 2030년 19.7%로 감소한다. 같은 기간 원전 비중이 27.4%에서 32.4%로, 재생에너지발전 비중은 7.5%에서 21.6%로 늘어나지만 이들 발전은 모두 수도권에서 먼 국토 끝단에서 이뤄진다.


세계 1위 파운드리 기업인 대만의 TSMC가 정부 지원을 받아 룽탄과학단지 내 발전설비를 교체하며 안정적 전력망 구축을 꾀하는 것과도 대조적이다. 국내에서는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전력망 구축에 투자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평택 반도체 공장에 전력을 공급받고자 2014년부터 고압송전선 건설을 위해 지불한 비용은 750억 원에 달한다. SK하이닉스도 1조 6800억 원을 투입해 이천·청주 공장에 자체 발전소를 짓고 있다. 조항진 포스텍 교수는 “수출 주도형 국가인 우리나라의 주력 산업 대부분이 전력 다소비 장치산업이라 저렴한 고품질 전기는 산업 경쟁력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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