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강화엔 왜 교회가 많을까…걸어서 만난 근대 문화유산

'한교총 기독교 근대 문화유산 탐방' 가보니

인천에 있는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에 새겨진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모습.

국제적 교류 과정에서 종교도 마찬가지로 전파됩니다. 우리나라로의 기독교 전파는 다양한 루트를 통해 이뤄졌습니다. 일단 최초의 천주교 선교사는 16세기말 임진왜란 때 왜군과 함께 웅천(진해)로 들어온 스페인인 세스페데스 신부로 평가됩니다. 물론 이는 전쟁통에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죠. 천주교는 이후 조선 후기에 중국을 통해 본격적으로 전래됩니다. 중국인 신부, 프랑스인 신부 등이 입국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는 중국을 거쳐 마카오를 다녀왔지요.


오늘은 개신교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점에서 개신교의 전파는 보다 더 확실합니다. 개신교 교계에서는 1885년 4월5일 그해 부활절이라는 날짜를 특정합니다. 그날은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펠젤러와 장로교 선교사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함께 인천에 상륙한 날입니다. 이후 조선 정부의 박해에 대한 걱정 없이 개신교는 전국에 확산됐지요.


19세기 말 기독교가 보다 자유롭게 우리나라에 전파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종교 및 역사학계에서는 주로 3가지 이유를 듭니다. 우선 당시 미국과 유럽 등 서양 선교사들의 해외 선교 의지가 높았습니다. 멀리 한국까지 찾아왔다는 것이죠. 이와 함께 이들 국가의 정부들도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하고 유인책을 자국민에게 제공하지요.


다른 한편으로 조선의 사정으로는 당시 민중들의 필요성이 높았다는 것입니다. 빈곤과 차별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기존의 불교나 유교(유학)의 대체재를 갈구합니다. 무서운 무기를 갖고 있고 신기한 물건을 다루는 서양인들의 종교니 뭔가 있을 수 있다는 기대였지요.


특히 이 시기가 다른 시대와 달랐다는 것은 기독교에 호의적인 조선 정부의 의지였습니다. 19세기 말 중국(청)과 일본의 군사적·경제적 위협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서양 국가들의 지원을 찾게 됐다는 겁니다. 미국이나 영국, 러시아 등에 도움을 구하는 상황에서 마찬가지 그들의 종교에 대해서도 관용 정책으로 나간 겁니다. 마침내 종교 박해가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더 혜택을 받게 됩니다.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 전경.


최근 한국교회총연합에서 진행한 ‘기독교 근대 문화유산 탐방’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첫 장소는 인천광역시 중구 항동1가 5-2에 있는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입니다. 이 기념탑은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이곳에 도착한 100주년을 기념해 1986년에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140주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현재 기념비에는 세 사람의 청동상이 있습니다.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 입니다. 아펜젤러는 감리교 목사이고 언더우드는 장로교 목사입니다. 동상은 이들 세 사람이 조선에 개신교 첫 선교사로 도착한 순간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들이 4명이라고 합니다. 아펜젤러 부인의 뱃속에는 아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펜젤러 부인은 그해 11월 여자아이 앨리스를 출산합니다. 앨리스는 후에 이화학당에 근무했으며 현재 양화진묘역에 잠들어 있습니다.


박철호 기념탑교회 담임목사는 “종 모양 형태의 이 탑은 종을 칠 때마다 복음이 퍼져나간다는 의미”라며 “가운데 기둥에는 한국 내 선교 과정을 조형물로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기념탑은 해변에서 직선으로 200m 가량 떨어져 있습니다. 물론 이들 선교사들이 이곳에 상륙할 때는 기념탑 자리가 바다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간척을 통해 육지로 됐지요. 100여년의 시간은 땅의 모양도 바꾸어 놨습니다. 그러면 이들의 정확한 상륙지점은 어디일까요. 자 본격적으로 투어를 해볼까요.



기념탑교회 내부의 절벽 바위. 여기에 아펜젤러 및 언더우드 선교사가 탄 배가 접안했다고 한다.

기념탑에서 약 60m 북쪽으로 걷다보면 ‘기념탑교회’이 있습니다 . 이 교회 자리가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인천에 상륙에 진짜 첫발을 디딘 곳이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 들어가면 안쪽으로 돌이 깎인 절벽 바위가 있습니다. 간척되고 집을 지었는데 100여 년전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바위를 드러냈습니다.


교회 안에는 당시의 사진들이 많이 걸려 있습니다. 두 선교사가 방문했을 때의 모습을 추체험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꼭 돌을 만져봅니다. 100여년전 선교사들의 체취가 느껴지시나요.



인천내리교회 전경.

발걸음을 돌려 인천내리교회로 이동합니다. 기념탑에서 동쪽으로 걸어서 20분 정도, 1.5㎞를 이동하면 ‘인천내리교회’가 있습니다. 행정구역 상으로는 인천시 중구 우현로6번길 3-1입니다. 아펜젤러가 1885년 7월 29일 첫 예배를 드린 교회입니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라고 합니다.


전쟁과 화재를 거치면서 교회는 계속 신축을 했지만 위치는 바뀌지 않았다고 합니다. 건물 벽에는 각각 1901년, 1955년, 1966년, 1984년에 새긴 머릿돌이 붙어 있습니다. 그만큼 역사가 오래됐다는 것이죠. 처음에는 한옥 건물이어서 머릿돌이 없고 이후 신도가 늘게 되자 1901년 붉은벽돌로 ‘웨슬리 예배당’을 지었다고 합니다. 웨슬리는 감리교 창시자입니다.



내리교회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머릿돌들.

내리교회 역사관에 과거 교회 모습의 모형들이 전시돼 있다.


내리교회에는 역사관도 있어요. 이곳에서는 내리교회의 성장을 상징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벌어지는데 인천도 전쟁터가 됐습니다. 한밤중에 홍두깨라고 피난을 가게 된 주민들이 집문서 같은 귀중품을 내리교회에 놓고 갔답니다. 미국인 목사가 있는 교회를 일본군들이 침탈하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했겠죠. 당시 일본도 서양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피란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물건을 간직했다 그대로 돌려준 교회 측에 아주 감사를 했다고 합니다. 교회를 믿게된 신자들이 크게 늘어난 것도 당연하고요.


대한제국 시기인 1900년대 초 우리 국민의 해외 이민사는 하와이에서 시작합니다. 하와이 이민에서 내리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하와이 노동자가 부족하다는 소식에 이 교회 조지 존스 목사가 나서 호러스 알렌 주한미국대리공사와 함께 이민자를 모집합니다. 첫 사례로 1902년 12월말 내리교회 신자를 중심으로 97명이 현지에 도착합니다.



인천내리교회 최영호 부목사가 내리교회 설립자들의 흉상을 설명하고 있다. 왼쪽부터 아펜젤러 목사, 한국최초의 목사인 김기범, 조지 존스 목사다.


하와이 이민자들은 현지에서 교회를 세웁니다. 독립운동도 적극 후원했는데 이들은 나중에 이승만의 지지세력이 되지요. 이승만도 감리교도였습니다. 덧붙여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 교민들의 성금을 바탕으로 ‘한국의 MIT’를 목표로 세운 학교가 인하대입니다. 하와이 한인 교포 이주 50주년 사업이었습니다. ‘인하’는 인천의 인(仁)과 하와이의 하(荷)를 한 자씩 따서 작명했다고 합니다.


허은철 총신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한국 교회에서 인천은 최초의 도시로, 경계를 허물고 선교에 앞장선 지역, 즉 동양과 서양의 ‘만남’을 이룬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인천내동교회 전경.


내리교회에서 언덕길을 약 100m 가량 올라가면 대한성공회 내동교회를 만납니다. 주소는 인천시 중구 개항로 45번길 21-32입니다. 같은 개신교지만 성공회는 감리교·장로교 보다는 다소 늦게 한국에 왔습니다. 성공회는 영국에서 존 코프, 마크 트롤로프, 엘리 바 랜디스 등 선교사가 1890년 인천에 도착하면서 조선 선교를 시작합니다. 코프 선교사는 1891년 내동에 성 미카엘 교회를 설립하고, 랜디스 의료선교사는 인근에 성 누가병원을 열었다고 합니다.


성 누가병원은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제물포해전’에서 일본군에 의해 격침된 러시아 전함의 부상 병사들을 치료한 곳이기도 합니다. 2004년 러시아 정부가 고마움을 표하는 명판을 제공했고 이는 현재 내동교회 별관 건물에 부착돼 있습니다.



내동교회 안의 ‘영국병원’과 ‘랜디스 기념비’ 표지석.


‘성 누가병원’이 있던 자리가 현재의 내동교회 자리입니다. 한국전쟁 직후에 영국 참전용사와 유가족 등의 성금으로 당시 파괴된 성 누가병원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대한성공회 인천 내동교회’를 새로 세웠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내동교회에는 병원 관련 역사의 흔적들도 많습니다.


영국의 ‘성 누가병원’을 말하는 ‘영국병원(英國病院)’이라고 새겨진 표지석, ‘의학박사 랜디스 기념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동교회와 성 누가병원의 상징인 ‘고요한(코프) 주교’와 ‘랜디스 박사’의 흉상도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인천제일교회 모습.


내동교회를 나서서 자유공원 둘레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 ‘인천제일교회’가 나옵니다. 인천제일교회는 앞서 내동교회·내리교회와는 달리 장로교회입니다. 인천제일교회는 1946년 설립됐다고 합니다. 장로교회의 인천 상륙은 다소 늦은 셈이지요.


이유가 흥미롭습니다. 개신교 전래 초기 외국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선교지 분할 협정’이라는 것을 맺었다고 합니다. 일종의 신사협정으로 과당 경쟁을 막자는 것이었죠. 이에 따라 평안도와 황해도는 미국 북장로교, 호남은 미국 남장로교, 인천·충청·강원도는 감리교 등으로 선교지역을 나눴습니다.



인천제일교회 인근의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이다. 인천은 미국과 인연이 깊다.


이 협정에 따라 장로교는 처음에 인천 선교를 피했습니다. 사정이 바뀐 건 남북 분단 때문입니다. 해방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한의 개신교 신도들이 대거 월남했습니다. ‘분할 협정’ 대상이 일부 없어진 것이죠.


인천에 주로 장로교인들이 많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이들을 위해 1946년에 인천 최초의 장로교회인 제일교회가 설립됐습니다. 인천제일교회 최고는 ‘바다뷰’ 입니다. 교회 앞에 서면 인천 항구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내리교회와 내동교회에서는 없던 뷰 입니다.



강화도 강화읍교회 전경. 전형적인 한옥 형식이다.


인천의 교회 문화유산 순례는 강화도로 이어집니다. 강화도에도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지금은 한국(남한)에서는 강화도가 변방이지만 남북 분단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강화도는 서울로 들어오는 한강의 입구입니다. 수도권에서 요충지였다는 것이죠. 서양 국가와의 전쟁인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이곳에서 잇따라 일어난 이유이기도 합니다.



강화읍교회 내부 모습.


강화도에 들어서서 강화군 강화읍 언덕 위에는 ‘교회’ 같지 않은 교회가 서 있습니다. 불교의 절 같기도 합니다. 일단 겉모습은 누가 봐도 기왓집 한옥입니다. 바로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입니다. ‘강화읍교회’로 불리기도 합니다. 1900년에 만들어진 이 교회는 한국전쟁 중에도 소실되지 않고 원형이 보존돼 있습니다. 말 그대로 문화재(문화유산) 급입니다. 특히 기독교의 토착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물이기도 합니다.



강화읍교회 전면 모습. ‘천주성전’ 편액과 한자 주련 현판에 눈길이 쏠린다.


교회의 입구는 동쪽에 있습니다. 정문은 마치 사찰의 일주문 같습니다. 절의 사천왕만 없을 뿐이지 삼문의 형식이 똑같습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내삼문이 있는데 내삼문에는 절의 범종 같은 대종이 있습니다. 본건물에 십자가와 ‘天主聖展(천주성전)’이라는 글자의 편액이 있어 교회임을 느끼게 합니다. 이외에도 건물 정면 기둥에 한시 주련이라든지, 예배당 안에 ‘萬有眞原(만유진원)’ 등 한자로 가득합니다.


또 마당 한켠엔 불교에서 깨달음의 상징인 보리수나무도 있습니다. 1900년 트롤로프 신부가 인도에서 10년 된 보리수나무 묘목을 가져다 심은 것이라고 합니다. 대문에는 태극이 있는데 태극에 십자가 문양이 덧씌워져 있는 것도 독특합니다.



강화읍교회 내부에 있는 보리수나무.


강화읍교회의 이런 외관 때문에 당시 이 앞을 지나는 이 건물을 향해 합장배례를 하고 지나가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옵니다. 강화읍교회 관할사제인 이경래 신부는 “불교와 유교 등 기존 종교를 존중하며 서로 갈등을 빚지 말고 사회에서 화합하자는 뜻을 교회 건축과 조경에 담아냈다”고 설명했습니다.



강화 교산교회 전경.

강화도 선교의 계기가 된 ‘선상 세례’ 조형물이 교산교회 앞에 있다.



강화도 교회 순례의 두번째 코스는 ‘교산교회’입니다. 강화도 섬의 북서쪽에 위치하는 데 주소는 강화군 양사면 서사길 296입니다. 존스 감리교 선교사는 인천에서 만난 이승환이라는 사람의 요청에 따라 그의 어머니에게 세례를 하기 위해 강화에 왔습니다. 그런데 신미양요 이후 여전한 거부감을 가진 주민들의 입도 반대로 세례식은 깊은 밤 배 위에서 진행됐다고 합니다. 이런 이례적인 ‘선상 세례’를 계기로 강화도에 첫 교회인 교산교회가 1893년 설립됐습니다. 이후 이곳의 신도들이 강화도 전역으로 교회를 전파하게 됐지요. 때문에 지금도 강화도에는 감리교 비중이 높습니다.


교회 앞에는 배 모양에 존스 목사와 한 여성이 세례를 하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현재 교산교회는 선교역사관으로 탈바꿈한 옛 교산교회와 새로운 예배당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교산교회는 1953년에 건립된 것으로 그 자체로 문화재이기도 합니다.



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 전경.


강화 교회 순례의 마지막 코스는 강화도의 입구에 세워진 ‘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으로 하면 좋습니다. 주소는 강화군 강화읍 강화대로 154번지 12-21입니다. 강화대교를 지나 강화도에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 당산 아래에 있습니다. 지난해 3월에 개관을 했으니 나름대로 ‘신상’입니다. 이곳에서는 강화도의 개신교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죠. 2018년 집계 따르면 강화도 전체 주민의 31%가 기독교인입니다. 강화도내 교회는 200개가 넘습니다



최훈철 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 이사장이 전시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화도 출신인 이동휘(1873~1935) 선생이 남긴 국내 유일의 유품이라고 한다.

기념관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으로는 강화군의 기독교 문화유산과 연계한 성지순례길 체험이 있습니다. 존스선교사의 길, 권신일선교사의 길 등 7가지 루트가 있습니다. 해설사와 강화도 성지순례길을 걸으면서 체험하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최훈철 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 이사장은 “강화도의 역사를 하려는 사람들로 신청자가 많다”고 말했습니다.


글·사진(인천)=최수문기자 chsm@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